‘카공족’(카페에서 공부하는 학생)이라고 불리는 취업준비생들이 지난 29일 밤 11시30분께 서울 강남의 한 커피숍에서 공부하고 있다. 박상용 기자
‘카공족’(카페에서 공부하는 학생)이라고 불리는 취업준비생들이 지난 29일 밤 11시30분께 서울 강남의 한 커피숍에서 공부하고 있다. 박상용 기자
30일 새벽 6시30분 서울 노량진 고시촌. 한 교회 식당 출입구 앞에 청년 수십 명이 추위에 떨면서 줄을 서 있었다. 교회에서 주는 아침밥을 기다리는 취업준비생(취준생)들이다. 이곳에서 만난 신모씨(27·여)는 “7급 공무원 시험을 준비하면서 3년째 고시원에서 생활하고 있다”고 했다. 그는 “생활비가 바닥날 때마다 이곳에서 아침 끼니를 때운다”며 “얼마 전엔 통신요금이라도 아끼려고 휴대폰도 정지시켰다”고 말했다.

연세대를 나온 손모씨(28)는 1년 반째 취업에 도전하고 있는 스스로를 ‘김혜자의 노예’라고 소개했다. 배우 김혜자 씨가 광고하는 편의점 도시락으로 하루 최소 두 끼를 해결하고 있어서다. ‘혼밥족’(혼자 밥 먹는 사람들) 중에서도 ‘편도족’(편의점 도시락을 먹는 사람들)이다. 손씨는 “편의점 알바생(아르바이트생) 보기가 창피해 인근 편의점 네 곳을 골고루 다닌다”며 “60여곳의 기업 입사시험에서 떨어지다 보니 늘 초조하고 여유가 없어 혼자 도시락을 먹는 게 편하다”고 했다.

병신년(丙申年)이 저물어가는 세밑, 취준생들은 ‘잔인한 연말’을 보내고 있다. 올해를 되돌아보기엔 아프고, 내년을 생각하니 불안하다. 당장 두 달 뒤면 상반기 공채 시즌이 시작된다. 내년 취업 경쟁은 더 치열해진다고 한다. 연일 계속되는 ‘최순실 국정농단’ 소식에 화를 내다가도 스스로 다독이며 고군분투한다.

은둔하는 취준생들

취준생에겐 저마다 사연이 있다. 공부하는 방식, 살아가는 방식도 각양각색이다. ‘은둔족’이 가장 많다. 서울시립대 4학년 김모씨(26)는 “내년부터 휴대폰도 끊고 외부 연락을 차단한 상태에서 공무원 시험이 끝나기 전까지 죽었다 생각하고 폐인처럼 지낼 계획”이라고 했다. 서울 도봉구에 사는 그는 매일 새벽 6시 노량진으로 ‘출근’해 밤 11시까지 학원과 독서실을 오가며 공부한다. 그는 “하루에 한마디도 안 하고 공부하면 입에서 단내가 난다”며 “혼잣말을 중얼거리는 습관도 생겼다”고 털어놨다. 이어 “하루에 최소 8시간 이상 앉아 있다 보니 무릎에 물이 찬 적도 있다”며 “병원에 주기적으로 가 무릎에서 물을 뺀다”고 했다.

고려대 졸업을 앞둔 김모씨(29)도 “연말에 취직한 친구들을 만났더니 마음이 더 좋지 않았다”며 “취업에 성공할 때까지 사람들을 만나지 않으려고 각종 카카오톡 단톡방에서 답을 안 하고 있다”고 말했다.

취업 준비 기간이 길어질수록 학교를 피해 곳곳에 숨어 공부하는 이들이 많다. 학교 도서관에서 벗어나 카페, 술집 등에서 공부하는 취준생도 적지 않다. 24시 카페를 가면 ‘카공족’(카페에서 공부하는 사람들)을 쉽게 볼 수 있다. 서울 강남역 인근 24시 커피숍에서 만난 한 취준생은 “별일 없으면 카페에서 밤을 새워 공부한다”며 “도서관처럼 아주 조용한 것보다 약간 소음이 있는 곳에 있는 게 마음이 편하고 공부도 잘된다”고 말했다.

“아끼고 아껴도 부모님께 죄송”

현실적으로 취준생을 가장 힘들 게 하는 건 ‘돈’이다. 취업이나 시험 준비를 위해 고향으로 돌아가는 ‘연어족’도 상당하다. 연세대 3학년 정모씨(24)는 올해 초부터 고향인 전남 순천에서 공부하고 있다. 정씨는 “서울에서 살면서 공무원 시험 준비를 하려면 집세를 포함해 매달 100만원가량 든다”며 “2~3년 공부해야 할지 모르는데 부모님한테 계속 돈을 타서 쓸 수 없었다”고 말했다.

임용고시를 준비하는 한양대 교육대학원 이모씨(25·여)는 “금요일 저녁부터 주말 내내 하루 8시간씩 학원에서 강의하다가 지금은 너무 힘들어 부모님한테 손을 벌리고 있다”고 했다. 대기업 취업을 준비 중인 최모씨(27·여)는 “아무것도 안 하고 공부만 해도 한 달 월세와 공과금, 통신비 등 70만원이 든다”며 “용돈도 받고 알바도 하지만 나이 들어서 계속 알바를 전전하는 것도 눈치 보이고 자괴감이 든다”고 토로했다.

반면 남다른 ‘스펙’을 갖추기 위해 거금을 아끼지 않는 취준생도 있다. 외모를 ‘제2의 스펙’으로 여기고 취업 전 성형하는 이들도 적지 않다. 최근엔 자연스럽고 개성 있는 인상을 위해 성형했던 코나 눈을 되돌리는 복원 수술도 인기라고 한다. 지난해 한 항공사 승무원으로 취업한 김모씨(26)는 “면접에서 번번이 탈락했는데 절개한 쌍꺼풀 라인을 봉합한 뒤 합격했다”며 “재수술 비용으로 200만원이 들었지만 아깝지 않다”고 했다.

방학 때 취업 학원에 등록하는 사람도 많다. 주로 자기소개서와 인적성검사(필기시험), 면접까지 종합적으로 지도하는 취업 학원은 한 달에 수십만원에서 100만원대 수강료를 받는다.

“촛불집회 갈 여력 없다”

취준생들은 스트레스를 풀 곳이 없다고 하소연한다. 요즘엔 취업 스터디를 구하는 것조차 스트레스라고 말한다. 상당수 스터디 모임은 자기소개서와 면접까지 요구하는 등 기업 못지않은 까다로운 절차를 거쳐 선발하고 있어서다. 월 5만원에 기업·직군별 스터디 모임을 구성해주는 스터디업체까지 생겼다.

최순실 국정농단 사태를 보면서 입시 비리는 물론 사회 부조리에 분노했지만 상당수는 체념하는 분위기다. 경기 북부에 있는 한 대학을 졸업한 심모씨(25)는 “촛불집회에 나가 역사적인 순간에 참여하고도 싶지만 지금은 취업이 더 급하다”고 말했다.

조모씨(27·여)는 지난 2년 동안 최종 면접에서 열 번가량 떨어지고 난 뒤 정신과 치료를 받고 있다고 했다. 그는 “내가 번 돈으로 부모님께 맛있는 것도 사드리고 선물도 드리는 게 꿈”이라며 “내년엔 당연히 ‘취뽀’(취업 뽀개기)할 수 있겠죠”라고 말했다.

박상용/김형규/조아란 기자 yourpencil@hankyung.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