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과장&이대리] 청바지 입고 출퇴근하는 '꿈의 외국계 기업?', 철저한 성과주의…문제 생기면 모두 내 책임
글로벌화가 진전되면서 주변에서 외국계(다국적) 기업에 다니는 사람을 쉽게 볼 수 있다. 산업통상자원부에 따르면 국내에 있는 외국계 기업은 올해 1만6000개를 넘어섰고, 총 기업 매출의 13.4%, 수출의 18%, 고용의 6%를 차지하고 있다. 근로자 100명 중 6명은 외국 기업에서 일한다는 의미다.

외국계 기업은 ‘상명하복’ ‘군대문화’ 등으로 상징되는 한국 기업과 달리 유연한 조직문화와 자유분방한 분위기로 구직자에게 인기가 높다. 근무하며 쌓을 수 있는 글로벌 인맥과 경험도 장점이다.

하지만 외국계 기업 직원도 나름대로 고충이 있다. 수십 년간 한국에서 자란 사람이 다른 문화적 배경을 지닌 조직에서 일한다는 것이 결코 쉬운 일은 아니다. 외국계 기업에서 울고 웃는 김과장 이대리의 이야기를 들어봤다.

외국인 상사와 눈물의 영상통화

국내 외국계 기업은 한국 기업에 비해 대체로 조직 규모가 작다. 또 집단적 협업보다는 개인의 능력을 중요시하는 경향이 있다. 밀어주고 끌어주는 끈끈한 정(情)에 익숙한 한국인에겐 낯선 풍경이다.

외국계 제조업체에 근무하는 신모 과장(29)은 이런 장벽에 부딪혀 좌절한 케이스다. 한때 신 과장은 대학 동기 사이에서 부러움의 대상이었다. 출퇴근 시간이 자유로운 데다 한국 기업에 다니는 동기들이 주말마다 회사 체육대회, 등산, 엠티 등에 끌려갈 때 신 과장은 동남아 휴양지에서 열린 본사 워크숍을 다녀왔다. 연공보다는 능력을 중시하는 사풍 덕분에 입사 몇 년 만에 과장도 달았다.

하지만 신 과장의 속은 갈수록 새까맣게 타들어갔다. 그는 “자유롭고 독립적인 분위기가 독이 된 순간이 많았다”고 털어놨다. 회사엔 일을 제대로 가르쳐주는 사람이 없었다. 업무에 문제가 생기면 모든 것을 책임져야 했다. 조언을 구할 만한 상사도 없었다. 결국 신 과장은 지나치게 많은 업무 부담과 스트레스에 시달린 끝에 퇴사를 결심했다.

퇴사 의사를 전하기 위해 해외에 있는 외국인 상사와 영상통화를 했다. 회사를 그만두겠다는 말을 영어로 어떻게 표현할지 떠올리던 순간 갑작스레 서러움이 밀려왔다. “혼자 모니터 앞에서 엉엉 우는 저를 보며 상사도 당황하더군요. 평소 가까이서 보지 못한 탓에 제가 이런 고민을 했는지 전혀 몰랐던 거죠. 남들은 이런 일이 있을 때 상사가 술 한잔 사주며 위로해준다는데, 저는 외국인과 영상통화로 인생 얘기를 꺼낼 수밖에 없다는 게 처량하게 느껴졌어요.”

점심 식사도 하루 전 쪽지 보내야

지난해 외국 기업으로 이직했던 김모 과장(35)은 거의 1년 만에 다시 한국 기업으로 복귀했다. 낯선 근무환경에 적응이 안 돼서다. 외국 기업에선 같은 부서 동료와 점심을 먹는 것도 최소 하루 전 미리 메신저 쪽지를 보내 약속을 잡아야 했다. 회사에서는 사생활을 보장하기 위해 이런 규칙을 만들었다고 설명했다. 김 과장은 “마치 공식 문서를 결재받듯 밥 한끼에도 사내 메신저를 통한 절차가 필요해 동료애를 쌓기 힘들었다”며 “외부 약속이 없을 때 그냥 동료에게 가볍게 ‘밥 먹으러 가자’고 말할 수 있는 한국 기업이 얼마나 그리웠는지 모른다”고 했다.

한국 기업에 다니다 올초 외국계 화장품 회사로 옮긴 박모 대리(33)도 재이직을 고민 중이다. “외국계라고 해서 ‘호랑이 상사’가 없는 게 아니었어요. 살인적인 업무 강도 역시 한국 기업과 별반 다를 게 없었죠.” 무엇보다 박 대리를 힘들게 한 건 후배에게 일을 가르쳐주는 한국 기업과 달리 지금 회사에선 아무도 그에게 신경쓰지 않는다는 점이었다. 일을 하다 행여 실수라도 하면 책임은 고스란히 자신의 몫이었다. “외국 기업이 한국에 들어오면 나쁜 것만 ‘현지화’된다더니 맞는 말 같아요.”

간판만 외국 기업이고 한국식 조직문화를 그대로 유지한 곳도 있다. 외국계 유통회사에 다니는 이모 주임(32)은 주변에서 외국 기업 다닌다며 부러워할 때마다 속으로 한숨을 쉰다. 이 주임의 회사는 원래 한국 기업이었지만 외국 기업에 인수되며 대주주만 바뀌었을 뿐 조직문화는 특유의 보수적 문화를 그대로 지니고 있다. “여전히 휴가를 쓸 때 상사 눈치를 봐야 해요. 1주일이 넘는 장기 휴가는 꿈도 못 꾸죠. 회식은 2차, 3차까지 원하지 않아도 끌려다녀야 하는 것도 똑같아요.” 심지어 이 회사에선 사내 성희롱이 빈번하지만 아무도 문제 제기를 못 하고 있다.

대출·카드에서 남모를 ‘차별’

외국계 회사원으로 겪는 생활 속 불편함도 적지 않다. 올해 초 국내 4대 그룹 계열사에서 외국 기업으로 이직한 최모씨(34)는 얼마 전 황당한 경험을 했다. 3000만원가량 신용대출을 받기 위해 은행에 갔는데 예전보다 훨씬 높은 금리를 제시받은 것이다. “이직을 해서 작년보다 연봉이 올랐는데 어떻게 된 거냐”고 따져 묻자 “전 직장에 비해 지금 회사의 등급이 낮아 금리를 우대해주기 어렵다”는 답변이 돌아왔다. “어쩐지 회사 이름을 얘기하는데 은행원이 ‘듣도 보도 못한 생소한 회사’란 묘한 표정을 지었다”고 최씨는 말했다.

외국계 전자회사에 다니는 장모 부장은 신용카드사에 고액 연봉자만 발급받을 수 있는 프리미엄카드를 신청했다. 며칠간 신용 조회 결과를 기다렸는데 뜻밖에 발급 거부 통보를 받았다. 카드사 상담원은 “죄송하지만 재직하는 회사와 연봉 수준 등을 고려할 때 발급이 불가능하다”고 설명했다. 하지만 대기업에 다니는 친구 중 한 명은 그 카드를 몇 달 전 발급받아 잘 쓰고 있다. 최씨는 “아무래도 외국계 기업이 인지도가 낮고 국내 지사 규모가 작다 보니 불이익을 보는 것 같다”고 투덜댔다.

청바지 입고 회장 마중

외국계 반도체 회사에 다니는 정모 과장은 미국 본사 회장이 방한할 때 공항에 마중 나가면서 청바지에 티셔츠를 입었다. 출근할 때 아내가 깜짝 놀라 “회장이 온다고 하지 않았냐”고 물었다. 그는 씩 웃었다. “걱정마. 회장도 반소매 티셔츠에 청바지 입고 올 거야.” 실제 회장은 청바지를 입고 내렸고, 정 과장은 그를 반갑게 맞아 숙소인 호텔로 안내했다. “정장은 특별한 경우 미리 공지할 때만 입으면 됩니다. 평상시 복장은 매우 자유로운 편입니다.”

미국 전자회사에서 근무하는 김모 사원은 올해 여러 번 실리콘밸리 출장을 다녀왔다. 회사는 입사 6개월 된 사원인 그에게 매번 600만원대 비즈니스석을 끊어줬다. “우리 회사는 6시간 이상 비행은 사장부터 사원까지 모든 직원에게 비즈니스석을 제공합니다.” 어떨 때는 임원 옆자리에 타야 한다. 하지만 걱정할 건 없다. 옆자리에서 의전을 하는 게 아니라 각자 알아서 타고 내렸다. “서로 프라이버시를 지켰죠. 비행 12시간 내내 말 한마디 안 하고 눈도 안 마주쳤어요.”

오형주 기자 ohj@hankyung.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