강만수, 'MB노믹스'의 아이콘에서 영어의 몸으로
조원동 전 청와대 경제수석이 검찰 수사 대상에 올랐다는 소식에 흔들렸던 기획재정부가 한때 수장이었던 강만수 전 장관의 구속 소식까지 전해지자 큰 충격을 받은 모습이다.

강 전 장관은 재정경제부와 기획예산처를 합쳐 만든 현 기획재정부의 초대 장관이다.

이명박 정부의 경제정책, 이른바 'MB노믹스'의 아이콘으로도 불렸다.

경제부처 관료 등 강 전 장관을 잘 아는 이들은 검찰 조사에 출석하면서 "평생 조국을 위해서 일을 했다.

공직에 있는 동안 부끄러운 일을 하지 않았다"는 강 전 장관의 말에 고개를 끄덕였다.

그만큼 평생 공직에 있으면서 국가경제를 걱정했던 강 전 장관의 충심에 대해서는 이견이 없다는 평가다.

강 전 장관은 경남고와 서울대 법대를 졸업하고 1970년 경주세무서 총무과장으로 공직생활을 시작했다.

이후 재무부 보험국장과 이재국장, 국제금융국장, 세제실장, 관세청장, 통상산업부 차관, 재정경제원 차관 등 경제 엘리트 관료의 길을 걸었다.

외환위기 이후 현역에서 물러나 무역협회 상근부회장과 디지털경제연구소 이사장 등을 맡으며 연구와 칼럼니스트로 활동하던 강 전 장관은 이명박 전 대통령과의 인연으로 다시 공직으로 복귀했다.

이 전 대통령과 소망교회를 함께 다닌 것을 계기로 이 전 대통령의 서울시장 시절 서울시정개발연구원장을 맡아 정책을 조언했고, 대선 과정에서는 일류국가비전위원회 부원장 겸 정책조정실장을 맡아 공약을 총괄 정리했다.

그 공로를 인정받아 경제 사령탑인 기재부 초대 장관을 맡아 747(연간 7% 경제성장, 4만달러 국민소득, 7대 경제강국)로 요약되는 MB노믹스 전파에 앞장섰다.

'강고집'이라는 별명처럼 강 전 장관은 소신을 굽히는 않는 뚝심과 추진력, 원칙론자로 유명했다.

2008년 금융위기 당시 한미 통화스와프를 체결, 국제통화기금(IMF) 외환위기와 같은 상황으로 불이 번지지 않도록 조기 진화에 나선 것은 강 전 장관 최대의 공으로 꼽힌다.

그러나 직설적인 화법으로 인한 말실수로 자주 논란을 불러일으켰다.

노무현 정부에서 만든 종합부동산세법에 대해 "중산층과 서민에게는 대못을 박으면 안되고 부자들에게는 대못을 박아도 괜찮은 것이냐"며 완화를 추진했고, "우리보다 잘사는 일본 도쿄로 쇼핑을 가는 것은 문제가 있다"는 발언을 하며 고환율을 용인하는듯한 태도를 보였다.

여기에 747에 대한 과도한 집착, 변화된 시대에 맞지 않는 구시대적 정책과 사고방식 등으로 경제위기를 키웠다는 비판이 나왔고 결국 최중경 당시 기재부 1차관에 이어 강 전 장관 역시 경질되면서 당시 기재부를 이끌던 이른바 '최-강 라인(최중경 차관-강만수 장관)'은 해체됐다.

그러나 이 전 대통령은 여전히 강 전 장관을 신임해 기재부 장관에 이어 국가경쟁력강화위원장을 맡겼다.

강 전 장관은 다시 2011년 산업은행장으로 자리를 옮겼다.

당시 부총리급인 기재부 장관 출신이 산업은행장으로 가는 것에 '격이 맞지 않는다'는 얘기도 있었지만 개인 사정으로 인한 불가피한 선택이었다는 소문도 돌았다.

결국 이 선택이 강 전 장관의 발목을 잡았다.

강 전 장관은 산업은행장으로 재직하면서 부실기업에 부당대출을 지시하고 지인 기업에 이권을 몰아준 혐의로 결국 구속영장이 발부됐다.

검찰 수사 단계인 만큼 강 전 장관의 혐의가 입증될지는 미지수지만 한때 우리 경제를 책임지던 기재부 장관의 구속 소식은 후배 경제관료들에게도 큰 충격으로 다가오고 있다.

임종룡 금융위원장과 최상목 현 기재부 1차관, 이찬우 차관보는 물론, 윤종원 주 경제협력개발기구(OECD) 한국대사, 김철주 청와대 경제금융비서관, 최희남 세계은행(WB) 이사, 황건일 기재부 국제금융정책국장 등 현직에 있는 쟁쟁한 관료들이 모두 강 전 장관과 함께 호흡을 맞춘 경험이 있다.

기재부의 한 관계자는 "조 전 수석에 이어 강 전 장관까지 계속 선배들의 불미스러운 일이 터지면서 기재부 공무원들의 자부심이나 사기도 많이 떨어진 상황"이라고 말했다.

(세종연합뉴스) 박대한 기자 pdhis959@yna.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