최순실 국정 농단 사태에 연루된 인물들은 대부분 ‘대포폰(차명 휴대폰)’을 썼다. 박근혜 정부 들어 ‘대포폰과의 전쟁’을 선언했지만 정작 청와대 소속 고위 공직자 등은 대포폰을 개통해 버젓이 이용한 것으로 드러났다. 각종 범죄에 이용되는 대포폰이지만 사용하는 것만으로는 현행법상 처벌을 받지 않는다. 대포폰을 개통하거나 명의를 빌려주는 행위와 달리 대포폰을 쓴 사람을 처벌하는 규정이 없어서다.

14일 검찰 등에 따르면 안종범 전 청와대 정책조정수석(57·구속)과 정호성 전 청와대 제1부속실 비서관(47·구속)은 검찰 조사 과정에서 대포폰을 사용한 정황이 나타났다. 검찰은 안 전 수석 자택 등을 압수수색해 대포폰 5~6대를 확보했다. 그는 검찰 수사를 앞두고 대포폰으로 정현식 전 K스포츠재단 사무총장을 회유하려 한 사실도 드러났다. 검찰이 압수한 정 전 비서관 휴대폰 4대 중 2대는 대포폰이었다. 정 전 비서관이 박근혜 대통령 및 최씨 등과 통화한 대포폰에서는 녹음파일도 발견됐다.
'최순실 일당' 대포폰 수십대 썼지만 처벌 못해
국정 농단의 장본인 최씨와 측근들도 대포폰을 주로 썼다. 최씨는 유령회사 직원이나 지인 명의로 10대 안팎의 대포폰을 개통해 사용한 것으로 알려졌다. 최씨 조카인 장시호 씨도 김종 전 문화체육관광부 차관 등 고위직과 핫라인을 구축해 대포폰으로 통화한 의혹을 사고 있다.

박 대통령이 대포폰을 썼다는 의혹까지 나왔다. 안민석 더불어민주당 의원은 지난 11일 국회 긴급 현안질의에서 “장시호 씨가 6대의 대포폰을 개설해 그중 한 대를 대통령에게 줬다”고 주장했다.

정부는 2014년부터 대포폰과의 전쟁을 벌이고 있다. 검찰, 미래창조과학부, 금융위원회, 금융감독원 등 관련 부처는 ‘서민생활 침해사범 합동수사본부’를 꾸려 집중 단속에 나섰다. 대포폰이 보이스피싱, 인터넷 사기 등 서민을 대상으로 하는 범죄에 악용되고 있는 탓이다.

사정이 이런데도 대포폰 이용자에 대한 처벌 규정은 없다. 대포폰을 개통하는 데 명의를 빌려준 사람은 전기통신사업법에 따라 1년 이하 징역이나 5000만원 이하 벌금에 처하는 것과 대조적이다. 미래부 관계자는 “부모가 자식 명의의 휴대폰을 쓰는 것처럼 차명 휴대폰을 사용했다고 해서 처벌하기에는 모호한 사례가 너무 많다”고 말했다. 이에 대해 경찰 관계자는 “대포폰을 이용해도 처벌받지 않으니 범죄자의 대포폰 수요가 줄지 않는 것”이라고 지적했다.

박상용 기자 yourpencil@hankyung.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