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 엔지니어에 기존 연봉 9배까지 제시…수십억 몸값 제안
업계마다 보안규정·R&D나 마케팅 등 핵심인력 교육 등 집안단속
"혹해서 옮겼다가 기술이전 이용만 당하고 1~2년내 돌아온 사례도"

산업팀 = 기술 추격보다 더 위험한 쓰나미가 몰려오고 있다.

전자, 자동차, 조선, 항공, 화장품 등 거의 전 업종에 걸쳐 중국 주요 기업들이 한국 인재들을 겨냥한 스카우트 전쟁을 전면화할 조짐을 보이기 때문이다.

특히 최근 중국의 인재 영입 전략은 국내 업계에서 수명을 다한 '퇴물'이 아니라 연구개발(R&D), 소프트웨어, 글로벌 마케팅 등 전문영역에서 핵심 경쟁력을 지닌 'S급', 'A급' 인재들을 겨냥한다는 점에서 사태의 심각성을 제대로 진단해야 한다는 목소리가 업계에서 나온다.

4일 업계에 따르면 삼성, 애플을 뒤쫓는 세계 3위 스마트폰 업체 화웨이(華爲)가 삼성전자 출신 앤디 호 전무(시니어 바이스 프레지던트)를 영입해 소비자 사업부문 임원으로 내정했다는 소식이 외신을 통해 전해졌다.

삼성전자는 앤디 호 전무가 임원으로서 계약기간이 만료돼 사임했고 전직 금지기간이 끝나 화웨이로 옮긴 것뿐이며, 중국 본토가 아니라 대만, 홍콩, 마카오 등을 담당하는 임원이라고 설명했다.

핵심 개발인력에 해당하는 인물이 아니어서 인력유출에 따른 피해를 우려할 정도는 아니라고 전직의 의미를 한정한 것이다.

하지만, IT전자업계에서는 중국 기업들의 공격적인 '인재 사냥'이 2~3년 전부터 노골적으로 전개되고 있고 수억원, 심지어 수십억원대 몸값 제안에 관한 소문도 공공연하게 들리는 상황이다.

업계에서는 중국의 24개 스마트폰 기업 중 핵심 프로젝트 매니저에 한국인이 없는 회사가 단 한 곳도 없다는 말도 나온다.

◇ 중국 디스플레이업체 CEO로 '상징적 스카우트'
반도체 산업을 7대 신성장 산업으로 육성하는 중국은 막대한 자금력을 동원해 인재 영입에 공격적인 행보를 이어가고 있다.

특히 한국이 주도하는 메모리 반도체 시장에 진입하기 위해 한국의 핵심 인력을 겨냥하고 있다.

한국 엔지니어들에게 기존 연봉의 최대 9배까지 제시했다는 소문도 들린다.

반도체 굴기(堀起)를 선언한 중국에서는 최근 칭화대 인맥을 등에 업은 칭화유니그룹이 자국 반도체 업체 XMC를 인수하면서 '반도체 공룡'으로 덩치를 키워 삼성, SK하이닉스에 대적할 태세를 갖추고 있다.

반도체 업계 관계자는 "전직 금지기간, 보안유출 금지 등의 조건을 걸기도 하지만 개인의 직업 선택 자유를 제한할 수는 없는 현실"이라며 "다만 핵심인력에 원하는 커리어를 보장해주고 지속적인 보상과 성과를 지급하는 방향으로 신경 쓰고 있다"고 말했다.

사실 국내에서도 반도체 인력은 넉넉한 편이 아니다.

특히 고학력 인력이 태부족한 형편이다.

한국산업기술진흥원에 따르면 반도체 산업기술 인력 중 대학원을 졸업한 인력은 전체 인력의 11.7%를 차지한다.

이들의 인력 부족률은 33.8%로 산업 평균치(6.0%)를 훨씬 웃돈다.

디스플레이 업계에서 중국은 이미 국내 인력을 전략적으로 영입해 일정 부분 성과를 거뒀다.

중국은 2003년 국내 LCD(액정표시장치) 업체 하이디스를 인수해 핵심 기술과 인력을 얻어 세계 5위의 BOE를 육성해냈다.

최근에는 차세대 기술인 OLED(유기발광다이오드) 인력을 영입하려는 움직임이 나타나고 있다.

디스플레이 업계 관계자는 "특히 OLED는 좋은 장비를 쓴다고 따라올 수 있는 게 아니라 축적된 경험과 노하우가 필요한 분야"라며 "중국 업체들이 국내 인력 유입을 타진하는 걸로 안다"고 말했다.

한국 인력을 최고경영진에 합류시키기도 했다.

차이나스타(CSOT)가 지난해 말 김우식 전 LG필립스LCD(현 LG디스플레이) 부사장을 CEO로 선임한 사실이 뒤늦게 알려졌다.

업계 관계자는 "김 전 부사장이 이직까지 3년간의 공백이 있었기 때문에 기술 유출 등의 우려는 크지 않다"며 "다만 상징적인 의미가 크다"고 설명했다.

일각에서는 김 전 부사장의 임명은 디스플레이 기술과 시장 정보, 인재 영입을 염두에 둔 조치일 것이라는 해석도 나온다.

◇ K-뷰티 핵심인력 상대 '집안단속' 나선다
중국에서 'K-뷰티' 열풍을 일으킨 화장품 업계도 인력 유출이 시작됐다.

중국 유명 화장품 브랜드 자연당(自然堂)은 2008~2014년 아모레퍼시픽 계열 브랜드 대표를 지낸 K씨를 최근 CEO로 영입하고, 연구소와 마케팅 분야에도 아모레퍼시픽 출신을 영입했다.

이니스프리·에뛰드 같은 가두점 중심의 브랜드숍 사업을 준비하기 위해서다.

LG생활건강과 애경을 비롯해 중소·중견 화장품 브랜드도 예외는 아니다.

중국 5위권 화장품 업체 프로야(PROYA) 그룹 역시 한국 화장품 회사 지분을 인수하고 아모레퍼시픽·LG생건 등에서 일한 경험이 있는 인력을 채용했다.

프로야는 이런 전략을 바탕으로 한국 시장에 진출하려는 계획을 세우고 있다.

국내 화장품 회사들은 퇴직한 일부 임원이 중국 회사의 제의를 받아 일하는 경우가 있지만 현직에 있는 임직원이 이직하는 일은 거의 없다며 걱정할만한 수준은 아니라는 입장이다.

회사마다 보안 규정을 두고 있으며 R&D와 마케팅 인력을 대상으로 교육도 진행하고 있다는 게 이들 업체의 설명이다.

다만, 중국 브랜드의 기술력이 발전하고 인지도가 높아질 경우 인력 유출이 가속할 가능성이 있다는 점에는 우려를 표시했다.

업계의 한 관계자는 "아직 한국 화장품 업계에서 일하다가 중국 회사로 이직할만한 요인이 많지 않아 오퍼(이직 제의)가 활발한 편은 아니다"면서 "하지만 중국 업체들의 위상이 지금보다 높아질 경우는 상황이 달라질 수 있다"고 말했다.

◇ KAL·아시아나 조종사 61명 작년 중국 비행기로 갈아타
항공업계에서는 항공기 운항의 핵심인력인 조종사들이 중국으로 이직하는 사례가 수년째 지속해왔다.

중국 항공사들은 한국보다 두세 배 높은 임금으로 국내 조종사 인력에 '러브콜'을 보내고 있다.

중국 항공사들이 베테랑 조종사 모시기에 적극적인 이유는 시장 규모가 급격히 커진 탓에 운항하는 항공기는 많은 반면 일정 경력을 갖춘 기장급 인력이 턱없이 모자라서다.

국제항공법상 여객기는 반드시 기장과 부기장을 함께 태워야 한다.

현지 항공업계에는 부기장급 인력이 많은데 이들이 기장 자격을 갖추려면 최소 10년 이상이 걸린다는 점에서 숙련도가 높고 문화가 유사한 한국인 조종사들이 영입 1순위로 꼽힌다.

한국인 조종사들도 중국 이직을 꺼리지 않는다.

가장 매력적인 것은 고연봉이다.

사측의 세금 부담과 주택, 자녀 교육지원 등 다른 혜택을 모두 고려하면 한국에서 일하는 것보다 2~3배 많은 돈을 번다는 계산이 나온다.

양호한 근무환경도 중국 항공사의 장점으로 꼽힌다.

우리나라 항공사들은 조종사들에게 연간 최대 1천50시간의 비행시간을 요구하는 반면 중국 항공사가 요구하는 최대 비행시간은 850시간에 불과하다.

대한항공의 한국인 조종사 퇴사자는 2013년 26명, 2014년 27명 수준이다가 2015년 상반기에만 42명으로 늘었다.

아시아나항공도 2013년 24명, 2014년 31명, 2015년 상반기 29명으로 증가세를 보였다.

전체 퇴사자 중 일부는 국적 저비용항공사(LCC)로 옮겼으나 기장급 인력 대다수는 중국 항공사로 이직했다.

작년 한 해 중국 항공사로 옮긴 조종사는 대한항공이 46명, 아시아나항공이 15명 정도다.

월스트리트저널(WSJ)에 따르면 지난해 중국 내 외국인 비행 기장은 한국이 전체의 20%로 1위를 차지했다.

이어 미국 14%, 멕시코 8.4%, 브라질 8%, 스페인 7% 순이었다.

국내 항공사 입장에서는 공들여 육성한 고급 인력이 빠져나간 자리를 메우는 일이 큰 부담이다.

운항 스케줄이 정해져 있어 대체 인력을 신속히 구하지 않으면 남은 인력들에 업무 과부하가 걸리고 비행 안전 저해로 이어질 우려도 있다.

다만 한국인 조종사의 중국 유출이 작년에 정점을 찍었다가 올해 들어 주춤하는 추세라는 시각이 있다.

항공업계 관계자는 "육성하는 데 오랜 시간이 필요한 고급 인력이 빠져나가면 회사로서는 당연히 걱정이 클 수밖에 없다"며 "다만 중국 항공업계의 성장기에 따른 일시적인 현상일 수도 있어 장기적으로 바라봐야 한다"고 말했다.

◇ 조선 구조조정 여파, 중국 경쟁사로 떠난다
조선업계에서는 구조조정으로 회사를 떠난 일부 핵심인력이 중국 경쟁사로 옮겨간다는 얘기가 심심찮게 들리고 있다.

앞서 주형환 산업통상자원부 장관이 지난 6월 조선 3사 최고경영자와 가진 간담회에서도 이런 우려가 제기된 바 있다.

특히 최근 대규모 인력 감축으로 핵심인력 퇴직 비율이 증가하는 추세라서 중국 기업이 한국 조선 3사의 전문인력을 확보할 기회가 많은 편이다.

한국조선해양플랜트협회에 따르면 조선 3사의 핵심전문인력(설계·연구개발·생산관리 종사자) 퇴직자는 2013년 287명, 2014년 340명, 2015년 1천91명이다.

2015년 조선 3사의 핵심전문인력은 총 1만943명으로 이 가운데 10%가 회사를 떠난 것이다.

이들 중 일부는 중국 업체로 이직한 것으로 추정되지만 그 규모가 크지 않을 것이라는 시각이 있다.

조선 3사가 핵심인력은 구조조정 대상에서 제외하도록 신경쓰고 있고, 중국 업체들도 글로벌 불황 속에 몸집을 줄이고 있어 공격적인 인재 영입에 나설 여력이 없기 때문이다.

조선업계 관계자는 "중국이 조선업에 강하게 드라이브를 걸던 시기에는 이직하는 직원들이 일부 있었지만 지금은 업황이 좋지 않다"며 "파격적인 조건으로 스카우팅하는 경우는 별로 없을 것"이라고 말했다.

중국에서 자동차를 만들어 파는 업체들은 중국 기업과 50대 50 합작사를 세워야 한다.

같은 공장에서 나란히 일하기 때문에 중국 기업이 한국 기업 직원들을 접촉하거나 관계를 쌓을 기회가 많은 편이다.

이 때문에 중국에 생산법인이 있는 현대·기아차는 기술과 인력 유출에 각별히 신경쓰고 있다.

특히 최근 몇년간 중국 토종 업체들이 턱밑까지 쫓아오는 상황에서 실력있는 연구원이나 엔지니어가 넘어갈 경우 실질적인 피해가 예상된다.

업계 관계자는 "사실 사람을 빼가는 게 기술을 얻는 가장 쉬운 방법"이라며 "아직 인력유출이 가시화하지 않았지만 가까운 미래에 중국 업체들의 많은 시도가 있을 것"이라고 전망했다.

◇ 정부에 인력유출 DB는 없어…"임원급 유출 관리는 필요"
현재 정부에는 인력유출과 관련한 데이터베이스(DB)가 구축돼 있지는 않은 상황이다.

정부는 화장품 등 일부 업계에서 고급인력의 해외유출이 있다는 점은 인지하고 있다고 한다.

다만, S급이나 A급 인력의 유출은 아니라는 것이 정부의 판단이다.

B급 인력이 나가는 경우에는 우려할 만한 정도의 핵심기술이나 영업기밀이 넘어갈 우려는 상대적으로 적기 때문이라는 판단도 하고 있다.

산업부 관계자는 "사실 진짜 우려되는 점은 한 명의 인력이 나가는 것보다는 팀을 싹쓸이해가는 것이다.

한 사람을 먼저 데려가고 그 사람을 중심으로 다른 사람들을 스카우트해서 팀을 꾸리는 방식은 문제가 될 수 있다"고 말했다.

정부 관계자는 "임원급 유출에 대한 관리가 필요하다는 생각은 하고 있다"고 전했다.

S급, A급 핵심인력이나 국가산업에 필요한 인재에 대해서는 DB를 구축하는 것도 방안이 될 수 있다.

그러나 직업선택의 자유를 침해한다는 논란이 일 수 있어 섣불리 추진하긴 어려운 게 현실이다.

DB의 범위를 정하는 것도 쉬운 일은 아니다.

◇ 무작정 옮겼다가 낭패 보고 돌아온 사례도 있다
삼성디스플레이는 지난 6월 사내방송 SBC에서 중국 디스플레이 업계에 대한 진단 프로그램을 내보내면서 인력 유출에 대한 내용을 언급하기도 했다.

SBC는 "당장 눈앞의 좋은 조건에 속아 이직하지 마라. 기술 유출 등에 이용만 당할 수 있다"며 "몇 년 안 가서 다시 돌아와야 할 수도 있다"고 전했다.

실제로 최근에는 중국으로 자리를 옮겼다가 난처한 상황에 부닥쳐 돌아온 사례도 있는 것으로 전해진다.

업계 관계자는 "중국 역시 초창기에는 좋은 조건으로 한국 인력을 모셔갔지만, 최근에는 계약직 형태로 고용하는 사례가 많다"며 "높은 연봉과 자녀 국제학교 입학 등 좋은 조건에 혹해서 옮겼다가 기술 이전에 이용된 후에는 1~2년 만에 돌아오기도 한다"고 전했다.

(서울=연합뉴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