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04년 미국에서 인공지능(AI)을 활용한 유방암 보조진단기기 ‘R2’가 출시됐다. 여성의 가슴 엑스레이에 나타난 까만 배경과 하얀 암 덩어리를 구분해 암 유무를 알려주는 기기다. 의사가 직접 엑스레이를 판독하는 것보다 비용이 적게 들고 정확도는 의사와 비슷했다. 미국에서 R2는 건강보험 항목에 포함될 정도로 보편화됐다.

하지만 이 기기는 한국 진출에 실패했다. 서울대병원, 삼성서울병원 등에서 여성 수천명의 엑스레이를 찍어 입력했지만 판독해내지 못했다. 한국인은 서양인과 달리 유방 조직이 촘촘한 치밀유방이 많다. 서양인의 데이터를 기준으로 한 R2는 엑스레이 배경과 암 덩어리를 모두 하얗게 인식하는 오류를 보였다.
'의료 알파고'는 빅데이터가 생명인데…융합연구용 진료정보 공유 길 막힌 한국
◆개인정보보호법에 막힌 연구

이는 AI 기술을 의료 분야에 활용하기 위해선 한국인에게 맞는 빅데이터 수집이 절실하다는 것을 보여준 대표 사례다. 김남국 서울아산병원 영상의학과 교수는 “의료는 바둑처럼 수학적인 것이 아니라 사람에 따라, 인종에 따라 차이가 난다”며 “의료용 AI 기술 개발을 위해 한국인 빅데이터 연구가 시급하다”고 설명했다.

IBM에서 개발한 AI 닥터 왓슨은 의사의 진단을 보조하는 역할을 한다. 환자 증상과 영상 데이터 등을 분석하고 판독해 적절한 치료법을 제시하면 의사는 이를 토대로 결정을 내린다. 국내 의료계에서도 AI를 활용한 기술개발을 시도하고는 있다. 서울아산병원 의료진은 AI가 폐 CT(컴퓨터단층촬영)를 분석해 폐암 유무를 알려주는 기술을 개발하고 있다. 분당서울대병원 의료진은 녹내장을 확인하는 안저촬영, 유방암을 확인하는 초음파 검사 등에 AI를 적용하는 연구를 하고 있다. 이학종 분당서울대병원 영상의학과 교수는 “빅데이터를 모으려면 클라우드가 필요하고 이를 분석해 사람에게 제시하려면 AI가 필요하다”며 “빅데이터, 클라우드, AI는 하나로 생각해야 한다”고 덧붙였다.

하지만 지원이 턱없이 부족한 데다 개인정보보호법 등의 규제로 연구에 속도를 내지 못하고 있다. 의료용 AI 개발을 위한 빅데이터 구축을 위해서는 개인정보보호법이라는 산을 넘어야 한다. 환자 정보를 수집해 연구에 활용하기 위해서는 환자 동의가 필수다. 환자에게 직접 연구 목적을 설명하고 익명화된 정보를 사용하겠다는 서명을 받아야 한다. 수천~수만개의 빅데이터 수집을 수작업으로 해야 하는 셈이다.

국내 환자들은 한 해 평균 14.3번 의사에게 진료를 받는다. 한 병원이 아니라 여러 병원에서 진료받는 환자가 많다. 김 교수는 “연구를 위해 10만명에게 일일이 전화해 동의를 받아야 한다”며 “주민등록번호를 사용할 수 없어 동명의 환자정보가 뒤섞이는 사례도 많다”고 지적했다.

◆환자정보 표준화 시급

의료기관에 따라 다른 영상장비를 사용하는 것도 걸림돌이다. 지멘스, GE 등 장비에 따라 분석방법도 조금씩 차이가 난다. AI를 효과적으로 학습시키기 위해 결과물을 표준화해야 한다는 지적이다. 미국, 영국, 일본 등은 국가 단위의 의료정보화 전략계획을 수립, 표준화를 추진하고 있다. 국내에선 원격의료 등에 대한 우려로 의료법 개정이 쉽지 않다.

국내 의료기관 대부분 전자차트 시스템을 사용하고 있지만 의료기관끼리 자료를 주고받는 비율은 2%에도 못 미친다. 최창민 서울아산병원 호흡기내과 교수는 “환자가 자신의 의무기록을 받으려 해도 출력한 종이 사본밖에 받을 수 없어 연구에 어려움이 많다”고 말했다. 진단정보를 표준화하고 자료 공유를 늘리면 의료비 절감에도 도움이 된다. 진료정보 공유 시범사업을 한 분당서울대병원, 대구경북대병원 등은 진료비를 13% 절감했다. 최 교수는 “규제를 해소하고 관련 지원을 늘리지 않으면 조만간 다른 나라에 한국 환자의 의료정보를 넘겨줘야 하거나 외국에서 개발한 제품을 사서 써야 할 것”이라며 ‘건강주권’ 차원의 대안 마련을 주문했다.

이지현 기자 bluesky@hankyung.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