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천자칼럼] 원폭이 없었더라면…
히로시마 원자폭탄 투하 70주년인 지난 6일 밤. 수많은 사람이 모토야스 강에 붉은 종이등을 띄우며 희생자들을 추모했다. 강변에는 폭탄을 맞은 그 유명한 철골 구조물이 앙상한 모습 그대로 남아 있다.

1945년 8월6일 새벽 사이판 부근 티니안섬을 출발한 미군 B-29 폭격기가 히로시마 상공에 도달한 것은 오전 8시15분. 최초의 원자탄 ‘리틀 보이’가 지상 570m 지점에서 터졌다. 순식간에 7만여명이 목숨을 잃었다. 사흘 뒤 나가사키에 두 번째 원자폭탄이 떨어졌다. 미쓰비시중공업 공장 500m 상공에서 터진 폭탄에 또 7만여명이 사망했다.

미군의 원폭 투하 후보지는 원래 히로시마와 교토, 니가타, 고쿠라였다. 당시 미국 전쟁부 장관 헨리 루이스 스팀슨은 1차 후보지에서 교토를 제외했다. 신혼여행 때의 좋은 인상 때문이었다. 일본 정신이 담긴 고도(古都)를 파괴하면 민심이 나빠져 전후 관리가 어렵다는 게 공식적인 이유였다. 당초 고쿠라로 향하던 두 번째 폭격기는 안개와 구름 때문에 나가사키로 방향을 틀었다.

수많은 시민이 죽어갔으니 원폭의 비극성은 아무리 강조해도 지나치지 않다. 그러나 무엇을 아무리 얇게 베어내도 거기에는 늘 양면이 있게 마련이다. 원폭 투하가 없었다면 양민의 희생은 줄었을까. 당시 정세를 보면 그렇지도 않다. 일본 본토로 전장이 확대됐다면 더 많은 사람이 죽었을 것이다. 그해 3월 도쿄대공습 때도 이미 10만여명이 목숨을 잃은 터였다.

더구나 대본영의 전쟁광들은 ‘1억 옥쇄작전’이라는 미명하에 전 국민을 죽음의 구렁텅이로 몰아넣고 있었다. 옥처럼 부서지겠다는 각오로 싸우거나 자결하라는 것이었다. 오키나와에서만 12만여명이 그렇게 죽었다. 가족끼리 면도날로 목을 그어 서로 죽이거나 수류탄으로 자결하는 어처구니없는 일이 전역에서 일어났다.

그 와중에 소련은 8월9일 선전포고와 함께 만주를 침공하고 한반도를 향해 남진했다. 미군은 그 해 말에나 일본에 상륙할 예정이었다. 원폭 투하가 없었더라면 일본 패망이 그만큼 늦어져 한반도 전체가 소련 공산군 수중에 들어갈 상황이었다. 이런 급박한 정세까지 아울러 보면 일본 원폭의 비극을 보는 한국인들의 심정은 복잡미묘해진다.

그때의 무고한 희생자들을 진심으로 애도하면서, 한편으로는 가슴을 쓸어내려야 하는 이 슬픈 역사의 아이러니라니. 가미카제 자살 소년들의 마지막 외침이 “일본 만세”가 아니라 “엄마!”였다는 것만큼이나 가슴이 오그라드는 일이다.

고두현 논설위원 kdh@hankyung.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