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부 외교적 노력 불충분하지만 불법행위는 아냐"

국내에 있는 일제강점기 나가사키·히로시마 원폭 피해자들이 우리 정부를 상대로 한 손해배상 청구 소송에서 패소했다.

서울중앙지법 민사합의26부(윤강열 부장판사)는 26일 "정부는 원폭 피해자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 일본을 상대로 외교적인 노력을 하고 있는 것으로 보이므로 국가의 불법행위가 성립한다고 볼 수 없다"며 원폭 피해자 79명이 정부를 상대로 낸 손해배상 청구를 기각했다.

이 소송은 2013년 8월 한국원폭피해자협회 회원 79명이 전체 회원 2천600여명을 대표해 우리 정부를 상대로 처음으로 제기한 소송이다.

이들은 2011년 정부가 원폭 피해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 한·일 청구권 협정의 분쟁 해결 방식에 따라 외교적 노력을 다하지 않는 것(부작위)이 헌법에 위배된다는 헌법재판소 결정이 나왔음에도 정부가 이후 제대로 조치를 취하지 않아 손해를 입었다며 1인당 위자료 1천만원을 청구했다.

한·일 청구권 협정 3조는 이 협정의 해석 및 실시에 관한 분쟁은 우선 외교상 경로를 통해 해결한다는 내용의 1항과 이를 통해 해결할 수 없는 분쟁은 중재 절차에 회부한다는 취지의 2항으로 구성돼 있다.

외교부는 헌재의 부작위 위헌 결정 이후 태스크포스와 자문단을 꾸려 일본 외교 당국과 원폭 피해자들의 배상 청구권에 관한 분쟁 해결을 위해 양자 협의를 제안하는 등 외교적 교섭을 벌였지만, 일본 측은 명시적인 대응을 하지 않고 있다.

이에 원폭 피해자들은 우리 정부가 한·일 청구권 협정 3조2항에 따라 이 문제를 중재 절차에 회부해야 함에도 의무를 이행하지 않고 있는 것은 불법이라며 이에 따른 손해 배상을 청구한 것이다.

그러나 재판부는 "한·일 청구권 협정은 외교상 경로를 통한 분쟁 해결을 우선하고 있으며 한-일 간에는 원폭 피해자 문제 외에도 일본군 위안부와 강제징용 피해자 문제 등 외교적 현안이 산적해 있으므로 양자 협의 제안 요구에 일본이 명시적인 대응을 보이지 않는다는 사정만으로 한국 정부가 중재 절차 회부의 의무를 부담한다고 보기는 어렵다"고 판단했다.

또 "한국 정부의 현재 조치가 고령인데다 피폭으로 인한 후유증에 시달리고 있는 원고들의 피해 구제의 절박성과 시급성에 비춰 충분한 것이라 평가하기는 어렵지만, 중재 회부는 2차적인 수단인 점과 외교관계의 특수성을 고려하면 정부의 조치가 충분치 못하다는 사정만으로 국가가 의무를 위반해 불법행위가 성립한다고 보기는 어렵다"고 덧붙였다.

하지만 법원의 이런 판결에 피해자들은 강하게 반발했다.

성낙구(72) 한국원폭피해자협회 회장은 "사법부가 헌재의 결정을 부정한 행태"라며 "일제강점기에 먹고 살기 위해 징병과 징용으로 일본에 가 원폭까지 맞았는데, 조국은 힘없는 우리를 무시하고 있다"고 성토했다.

이 소송을 대리한 최봉태 변호사는 "일본 외무성이 한국 원폭 피해자들에 대한 법적 의무가 없다고 주장해 배상이 이뤄지지 않고 있는데, 우리 사법부마저 한국 정부의 법적 의무를 부정했다"며 "도대체 어디에 가서 배상 의무를 주장해야 하느냐"고 비판했다.

(서울연합뉴스) 임미나 기자 mina@yna.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