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쟁영웅·박애주의자 金대령, 본받을 표상이죠"
“김영옥 대령이 남기신 겸손, 헌신, 용맹의 정신을 국민에게 널리 알리겠습니다.”

최근 서울 서초동에 ‘김영옥평화센터’를 열고 이사장으로 활동을 시작한 이영만 전 공군사관학교장(공사 27기·예비역 공군 중장·사진)의 말이다. 한국계 미국인인 김영옥 대령(1919~2005)은 2차 세계대전과 6·25전쟁에 참전해 빛나는 전공을 올린 전쟁영웅이다.

독립운동가의 아들로 미국 로스앤젤레스에서 태어난 김 대령은 1943~1945년 이탈리아와 프랑스에서 미군으로 2차 세계대전에 참전했다. 종전 후 미국으로 돌아가 사업을 하던 그는 6·25전쟁이 발발하자 사업을 접고 다시 참전, 중부전선에서 미군 최초 유색인종 야전대대장으로 활약하며 전세를 뒤엎는 데 결정적 역할을 했다.

김영옥 대령
김영옥 대령
이런 전공으로 그는 프랑스 최고 훈장인 레지옹 도뇌르, 한국 최고 무공훈장인 태극무공훈장, 미국 특별무공훈장·은성무공훈장 등 수많은 훈장을 받았다. 휴전 후 한국군 군사고문으로 한국군 최초 미사일부대 창설을 주도했다. 1972년 대령으로 예편 후에 미 정계 등의 영입 제안을 마다하고 장애인, 저소득층, 노인 등 사회적 약자들에게 봉사하는 삶을 살며 인권운동을 펼쳤다.

이 이사장이 김 대령을 처음 접한 건 2010년이다. 강연차 공군본부를 방문한 재미 언론인 한우성 씨가 건네준 김 대령 자서전 ‘아름다운 영웅 김영옥’을 읽고 나서다. “한씨는 ‘나는 자서전을 쓸 만한 인생을 살지 않았다’며 한사코 거부하는 김 대령을 1년여간 설득해 겨우 지난 이야기를 들을 수 있었다고 합니다.”

사실 김 대령은 개인적으로는 불행했다. 첫 번째 부인은 병으로 잃었고, 두 번째 부인은 6·25전쟁에 참전하느라 헤어졌다. 전쟁 중 부상 후유증으로 평생을 편치 못한 몸으로 살았다. 슬하에 자식을 두지 못해 현재 유일한 혈육은 세계적 의상디자이너인 누나 윌라 김(98)뿐이다.

“굳이 6·25전쟁에 참전하지 않았어도 됐는데…. 하지만 그분은 참전 이유를 묻는 질문에 ‘나는 늘 대한민국을 가슴에 품고 살았다’고 답했어요. 박애정신을 실천한 진정한 코스모폴리탄이자 세계화 시대를 사는 한국인들이 본받아야 할 표상입니다.”

이 이사장은 구형 전투기인 F-5 E/F 조종사로 강릉 제18전투비행단에서 주로 근무했으며 공군작전사령관, 합동참모본부 차장 등을 지내고 지난해 4월 예편했다. 2010년부터 동갑내기 한우성 씨와 막역하게 지내며 “나머지 인생을 ‘김영옥 알리기’에 쏟자”고 의기투합했다.

지난해 12월 법인 창립총회를 마쳤고 지난 13일 국가보훈처로부터 설립 승인을 받았다. 그는 “김 대령의 생일(1월26일) 전 선물을 드릴 수 있게 돼 참 감사하다”고 했다.

이 이사장은 서울 은평구에 ‘김영옥 평화센터기념관’도 지을 예정이다. ‘김영옥 팬’인 김우영 은평구청장도 부지 제공 등에 힘을 보태고 있다. 대한민국 임시정부 수립 100주년이자 김 대령 출생 100주년인 2019년 1월26일 완공을 목표로 하고 있다.

이해성 기자 ihs@hankyung.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