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金과장 & 李대리] 영어 때문에 4년째 승진 '물' 먹자 "토익의 '토'자만 들어도 토 나와"
▶상담 의뢰인: A은행 이 대리(37)

▶고민 내용: 은행 입사 6년차 이대리입니다. 요즘 저의 가장 큰 스트레스는 승진입니다. 지난 5월 과장 진급시험에서 떨어졌거든요. 작년에 이어 두 번째입니다. 입사 동기 중 승진 못 한 사람은 손가락에 꼽을 정도입니다. 안 그래도 서른이 넘은 나이에 입사해 나이가 많은데, 절 형이라고 부르는 동기들이 먼저 승진하는 걸 보니 씁쓸하더군요. 우울증에 탈모까지 겹칠 정도입니다. 머리카락만큼 말수도 적어지고 짜증만 늘었죠. 제게 닥친 또 다른 문제는 다가오는 추석입니다. B은행에 다니는 매형은 초고속으로 승진해 지점장 발령을 받고 승승장구하는데…. 부모님 뵐 낯도 없고요. 이 상황을 이떻게 이겨내야 할까요?

▶진단 및 처방: 승진 ‘트라우마’가 있으시군요. 지구 상에는 당신과 똑같은 문제로 고민하는 ‘김과장 이대리’들이 많답니다. 처방은 아래 얘기를 읽고 ‘무한’ 공감하며 “나는 지극히 정상적인 직장생활을 하고 있다”고 세 번 반복해서 외치는 것입니다.

○공개와 비공개의 사이

현대자동차그룹 계열사 C사 유 과장은 아침에 출근해 사내 메신저를 켤 때마다 마음 한구석이 아프다. 자신의 이름 옆에 붙어있는 ‘과장’이라는 꼬리표 때문이다. 그는 작년 말 차장 진급에서 미끄러졌다. 9개월이나 지났지만 아직도 상처가 아물지 않았다. 이 회사는 메신저 메일 등 사내 인트라 시스템에 부장 과장 사원 직책을 표시한다. 같은 이름을 가진 직원이 적지 않다 보니 직책으로 구별하기 위해서다. 승진자를 알려주는 방법도 개별 통지가 아닌 ‘전체 공개’다. 연말이 되면 인터넷 게시판에 승진자 명단 전체를 부문별로 발표한다. 게시글이 뜨면 자신 말고도 다른 동료가 승진했는지까지 바로 알 수 있어 압박감이 더 심하다.

반면 SK네트웍스 직원들은 승진 관련 스트레스가 상대적으로 적다고 한다. 승진 여부를 아무도 모르게 ‘비밀’에 부치기 때문이다. 이 회사는 대외적으로 입사 3년차는 대리, 5년차는 과장 등 해당 연차가 되면 정기인사 때 자동으로 호칭을 부여받고 승진 발령을 받는다. 그러나 ‘진짜’로 승진했는지는 자신만 알 수 있다. 사내에서는 개별적으로만 진급 시험에 통과했는지를 알려주기 때문이다. SK그룹 계열사인 SK텔레콤 SK커뮤니케이션즈 등은 아예 과장 대리 직책을 없애고 ‘매니저’라는 호칭으로 통일했다. 유 과장은 “승진 누락으로 스트레스를 받는 사람들에겐 부러울 따름”이라고 했다.

○그놈의 OO이 승진에 발목

사내에서 일 잘하고 성격 좋기로 소문난 중소기업 D사의 신 과장(41)에게는 치명적인 약점이 하나 있다. 바로 영어, 아니 토익(TOEIC)이다. 토익 800점을 넘지 못해 올해로 4년째 차장 승진 인사에서 ‘물’을 먹었다. 그는 큰 맘 먹고 강남 어학원 토익 집중공략 새벽반에 등록했다. 대학 졸업 후 10년 만에 책상에 앉아 수업을 듣다 보니 온몸이 꼬이고 졸음이 쏟아져 공부가 될 리 없었다. 야근이 잦아 수업도 한 달에 네댓 번밖에 나가질 못했다. 주변 사람이 보기에 신 과장의 영어 공부는 ‘귀가 트여야 한다’며 팝송을 듣고 자는 게 전부. 그럼에도 회사에 나와서는 “토익에 ‘토’자만 들어도 토가 나올 정도로 열심히 공부했는데 도통 점수가 오르지 않는다”고 너스레를 떤다. 신 과장은 “구시대적인 영어시험 때문에 회사가 나 같은 인재의 업무 능력을 제대로 평가하지 못하고 있다”며 한탄했다.

승진의 걸림돌은 또 있다. 사내 인터넷 강좌다. e러닝을 선도적으로 도입한 E사는 엑셀과 파워포인트, 워드뿐만 아니라 중국어 프랑스어 등 다양한 인터넷 강좌를 마련해놓고 있다. 학점을 이수하듯 신청한 수업을 듣고 시험을 봐야 한다. 신청한 과목을 패스하지 못하면 연말 인사 고과에서 마이너스 점수를 받는다. 이 회사 곽 대리(34)는 의욕이 왕성하던 올초 중국어를 신청했다 후회했다. 커리큘럼의 90% 이상을 이수하지 못한 것. 곽 대리는 결국 중국어를 잘하는 신입 사원을 물색했다. 수시로 불러내 밥과 커피를 사주며 대신 인터넷 수업을 듣고 시험을 봐달라고 부탁했다. ‘점수가 너무 좋으면 의심받을 수 있으니 서너 문제 틀려달라’는 부탁도 잊지 않았다.

○추석 선물 공세에 밤샘 독서실까지

승진을 위한 노력도 눈물겹다. 대기업 계열사 직원들은 인사철만 되면 안테나를 총동원, 모그룹의 동향을 파악하는 데 촉각을 곤두세운다. 그룹 전체 실적이 좋으면 계열사도 덩달아 승진 잔치를 벌이지만 반대로 실적이 나쁘면 그만큼 승진자가 줄어들기 때문이다. 올해 승진자가 많지 않을 것이란 소문이 돌면서 F사 계열사 박 차장은 울상이다.

6급 지방 공무원인 최 주무관은 추석을 앞두고 상사들에게 보낼 선물에 거금을 들였다. 평판 관리가 중요하다는 생각에 올해부터 명절 선물을 꼼꼼히 챙기기 시작했다. 승진을 위해 뇌물 공세를 해야 한다는 게 찜찜하지만 동료들이 열심히 선물을 챙기는데 가만히 손 놓고 있을 수만은 없다는 생각이다. 그는 “승진이 된다는 보장은 없지만 나중에 승진에서 떨어지면 후회할 것 같아 어쩔 수 없이 선물을 보내기로 했다”며 “한우 세트 값이 작년보다 떨어진 게 그나마 다행”이라고 했다.

진급 시험이 임박하면 샐러리맨들도 ‘고시생’으로 돌변한다. 스터디 모임을 만들어 밤샘 공부를 하고 선배들로부터 기출문제를 모은 ‘족보’를 구하러 사방팔방 뛰어다닌다. G사는 진급 시험 전 1주일간 승진 대상자들이 공부할 수 있도록 휴가를 주는 것이 관례처럼 돼 있다. 직원들은 설 연휴 이후로 시험 날짜가 잡히면 귀향도 미루고 독서실에서 공부에 매진하기도 한다. 이 회사 권 상무는 “나도 겪어봐서 알지만 대리, 과장 때 승진은 아무 것도 아니다”며 “위로 올라갈수록 힘들기 때문에 동료들보다 당장 뒤처진다고 조급해하지 말고 길게 보는 자세가 필요하다”고 조언했다.

전예진/황정수/박한신 기자 ace@hankyung.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