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金과장 & 李대리] 워크숍서도 주말 동호회서도 몸치 괴롭히는 '말춤의 공포'
최근 한 은행의 단합대회장. 임직원들이 대회에 앞서 만든 장기자랑 영상을 보여주는 순서가 됐다. 부산 지역의 한 지점에서 출품한 첫 번째 영상은 요즘 대세인 가수 싸이의 히트곡 ‘강남스타일’에 등장하는 ‘말춤’을 따라추는 동영상이었다. 지점장부터 막내 행원까지 함께 흥겹게 말춤을 추는 영상이 끝나자 우레와 같은 박수와 환호가 쏟아졌다.

이어진 영상에 등장한 팀도 똑같이 말춤을 췄다. 세 번째, 네 번째 동영상에서도 말춤이 등장했다. 결국 이날 장기자랑 대회에 나온 20개 팀의 동영상 중 17개가 말춤에서 시작해 말춤으로 끝났다. 반복되는 ‘말춤 영상’ 때문에 민망한 분위기가 됐다. 진행 실무를 맡은 총무과 김 과장은 “1000여개 팀에서 제출 받은 동영상 중 900개가량이 단체로 말춤을 춘 것이더군요. 본선에 오를 작품을 심사하는 저희도 지루해 혼났습니다.”

전 세계에 한국을 알린 싸이의 말춤이 김 과장, 이 대리에게는 이제 스트레스다. 회사마다 직원들에게 단체로 말춤을 추는 영상을 찍어 홍보에 활용하겠다고 하니 요즘은 일보다 말춤이 먼저다. ‘몸치’들에게는 그야말로 고역이다. 이번 주는 ‘말춤 스트레스’에 빠진 직장인들의 얘기다.

◆회사에서, 동호회에서, 집에서도 말춤

얼마 전 열린 회사 워크숍에서 직원들과 신나게 말춤을 추다 녹초가 된 김 과장. “막상 해보니 쉽지 않더군요. 단체로 동작을 맞춰야 해서 더 힘들었어요.” 그는 회사의 ‘공식 말춤’도 모자라 저녁 접대자리에서도 분위기를 띄우기 위해 말춤을 추다 지친 상태였다.

김 과장의 말춤 시련은 거기서 끝이 아니었다. 지난 금요일 유치원에 다니는 아들의 가을 학예회에서도 시작된 말춤의 습격. “어머님 아버님들, 아이들의 재롱을 보셨으니 답례로 말춤을 보여주세요.” 아들의 성화에 못 이겨 무대에 올라간 김 과장. 처음보는 학부모들과 또 다시 흥겹게(?) 말춤을 춰야 했다.

주말에도 말춤은 이어졌다. 김 과장이 매주 일요일마다 가는 검도 동호회가 창립 10주년을 맞은 것. 10주년 기념대회 중간 장기자랑 시간에 등장한 사회자의 외침. “여러분, 오늘은 우리 동호회가 10주년을 맞아 다같이 모인 만큼 싸이의 말춤을 단체로 추는 동영상을 찍어 올리도록 하겠습니다.”

◆몸치인데 어쩌라고…

회사에서 신입사원 교육용 동영상을 찍게 된 인사부 이 대리. 최 부장은 그에게 싸이의 말춤을 연습해오라는 지시를 내렸다. 문제는 그가 둘째 가라면 서러워 할 ‘몸치’라는 것. 싸이의 뮤직비디오를 수십 번이나 다시 보며 따라하려고 노력했지만 여전히 스텝이 엉킨다고. “말춤이고 뭐고, 아예 춤을 못 추는 저 같은 사람은 어찌해야 하나요.”

김 부장은 엉성한 말춤 때문에 최근 사장에게 제대로 찍혔다. 그는 출근길 회사 엘리베이터 옆에 붙은 공지를 보고 다리에 힘이 풀렸다. “회사에서 강사를 초청해 말춤을 가르칩니다. 금요일 오후 옥상에서 단체로 촬영을 해 회사 홍보에 쓸 계획입니다. 부서장은 의무 참석 대상입니다.”

몸치였던 김 부장은 너무 긴장한 탓에 그날 이후 며칠째 일이 제대로 손에 잡히지 않았다는데…. 촬영 당일, 쭈뼛거리며 따라하기는 하지만 순서가 헷갈린다. 이어지는 동작에서 스텝이 자꾸 꼬여 이마에서 식은 땀이 흘러내린다. 그래도 나름 열심히 하고 있는데 강사가 갑자기 음악을 끄더니 그에게 다가 왔다. “표정과 몸이 너무 굳어 있어요.” 앞에서 지켜보던 사장의 호통이 들려온다. “하기 싫어서 억지로 하는 사람은 그냥 내려가세요. 김 부장, 특히 자네는 빠지게.”

◆골절에 멍에…온몸이 만신창이

최근 여직원들에게 “오빤 강남스타일”이라며 노래방에 간 곽 부장도 말춤 때문에 곤욕을 치렀다. 말춤을 추다가 발목을 삔 것 같은 느낌이 들었다는 곽 부장. 직원들의 흥을 깨기 싫었던 데다 술도 꽤 취한 상태였던 그는 계속 말춤을 췄다는데. 집에 갈 무렵 통증이 심해져 병원으로 달려간 곽 부장. “발목 골절이라더군요. 어쩔 수 없이 깁스까지 했습니다.”

최근 회사에서 ‘말춤 플래시몹’을 찍게 된 유 과장도 예외는 아니다. 토요일 본 촬영을 앞두고 3일간 무려 8시간30분 동안 말춤을 췄다는 유 과장. 촬영 당일, 성공적으로 공연을 마무리하려는 순간 모여든 인파의 외침. “앵콜, 앵콜!” 유 과장과 직원들은 결국 그 자리에서 세 번을 더 춘 끝에 집에 갈 수 있었다고. “평생 출 춤을 다 췄습니다.”

◆말춤도 사람 봐가면서 시켜야지

얼마 전 한 금속회사의 직원 체육대회 장기자랑 시간. 분위기가 무르익자 외부에서 초빙한 전문 진행자가 말춤을 유도하며 사람들을 앞으로 불러냈는데…. 그 중엔 고지식하기로 소문난 한 임원도 있었다. 평소 독실한 기독교인이었던 그는 술도 안 마시는 데다 몸치에 융통성도 없어 행사 전체가 못마땅한 상황이었다.

그가 당황스러워하자 진행자는 더 큰 웃음을 유도하기 위해 직원들의 시선을 그에게 집중시켰다. 불쾌해진 그는 얼굴이 빨개져서 자리를 떠났고, 흥이 오르던 판도 그대로 깨졌다. 진행자 초빙을 담당한 직원 왈, “앞으로 이 업체는 우리 회사는 물론 회사의 다른 계열사와도 거래가 끊길 것으로 예상됩니다.”

◆춰도 문제, 안 춰도 문제

신입사원 홍씨는 말춤 연습으로 한동안 스트레스에 시달렸다. 회사에서 신입사원들에게 워크숍 때 장기자랑으로 말춤을 준비하라고 한 것. 강남스타일에 큰 관심이 없었던 그는 뒤늦게 동영상을 찾아보고 동기들과 맹연습에 들어갔다. “매일 저녁 업무가 끝나고 다같이 모여 2주 넘게 연습하고 워크숍에서 말춤을 췄습니다. 그런데 장기자랑 참가자의 90%가량이 말춤을 추더라고요. 저희 역시 그렇고 그런 말춤 참가자가 돼 맥이 빠졌죠.”

김 대리의 회사에서도 장기자랑 대회가 열렸다. 마땅한 아이디어가 없어 역시 ‘말춤’을 추기로 의기투합한 김 대리의 조. 이틀에 걸쳐 연습을 하고 있던 직원들에게 회사 총무부에서 단체 메일이 왔다. “이번 장기자랑 대회에서 말춤은 금지하기로 했습니다. 다른 신선한 아이템을 찾아서 준비하세요.”

◆말춤으로 대동단결

말춤이 나쁜 것만은 아니다. LS산전에 다니는 이모씨는 강남스타일 덕에 상사에 대한 생각이 바뀌었다. 이달 초 열린 회사 체육대회. 4개로 나뉜 각 팀의 응원단장은 대부분 임원 또는 고참 부장들이었다. 진행자가 즉석 댄스를 주문하자 4개 팀의 응원단장들이 모두 강남스타일에 맞춰 말춤을 추기 시작했다. “임원들은 일만 하는 줄 알았는데 말춤을 추는 모습에 깜짝 놀랐죠. 평소엔 먼저 다가가기 힘들었는데 체육대회날 모습을 떠올리면 더 편하게 대할 수 있을 것 같아요.”

또 다른 기업은 체육행사 장기자랑에 대비해 직원들을 댄스학원에 보내 말춤 교육을 시켰다. 2주일 동안 일과 후 회사 지원으로 춤을 배우니, 본인들은 장기를 만들어서 좋고 회사는 완성도 높은 공연을 준비해 일석이조의 효과를 봤다고. 회사 사장도 수준 있는 공연에 감동해 이례적으로 공연을 펼친 사원들을 따로 초대해 극진하게 저녁을 대접했다고 한다.

김일규/윤성민/강영연 기자 black0419@hankyung.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