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림 속의 선율] 경건한 교회 행사날 춤판을 벌인 사람들, 대체 무슨 일이…
[그림 속의 선율] 경건한 교회 행사날 춤판을 벌인 사람들, 대체 무슨 일이…
시골 마을이 오늘따라 야단스럽다. 한쪽에서는 거나하게 술판이 벌어졌고 다른 한쪽에서는 저마다 춤을 추느라 정신이 없다. 술상에 둘러앉은 인물들은 서로 내가 옳다,네가 그르다 목소리를 높이며 평소 뒤틀린 속내를 쏟아놓고 있다.

술상 오른편에는 얼굴이 발그레하게 고주망태가 된 농부가 혀 꼬인 소리로 악사를 귀찮게 하고 술판 아래에선 한 소녀가 이제 막 젖을 뗀 듯한 꼬맹이의 양손을 붙들고 춤사위를 전수하고 있다. 가관인 것은 술꾼들 뒤에서 진하게 프렌치 키스를 나누고 있는 한 쌍의 젊은 남녀다.

오른쪽에서는 짝을 지은 남녀가 혼신을 다해 춤에 몰입하고 있다. 그들 앞으로 초로의 부부가 이 춤판에 합류하기 위해 헐레벌떡 입을 헤 벌린 채 뛰어오고 있다. 할아버지는 가죽 외투를 입고 허리춤에 칼을 차 제법 모양을 냈다. 허,그런데 모자 위에 숟가락이 꽂혀 있다. 아마도 음식이 나오면 민첩하게 대응하기 위한 준비인 모양이다.

격식을 갖추지 않은 자유분방한 분위기로 보아 마을에서 혼인잔치라도 열린 것 같다. 그런데 자세히 살펴보면 그게 아니다. 마을 사람들이 추는 춤은 세속의 축제 때 추는 춤이 아니라 교회의 봉헌 축제 때 신을 찬양하며 추는 춤이기 때문이다. 경건해야 하는 날에 이 난장판 같은 분위기는 대체 무엇이라는 말인가. 이것은 화가가 의도한 것일까,아니면 실제로 그런 분위기였던 것일까.

이 모순적인 분위기의 비밀은 피터르 브뤼헐(1525?~1569)이라는 화가의 실체를 알면 자연히 풀리리라.브레다 부근의 작은 마을에서 태어난 브뤼헐은 스승인 피터르 쿠케 반 알스트로부터 네덜란드의 세밀화 전통과 인문주의자로서의 소양을 전수받았다. 1551년 안트베르펜의 화가 길드에 가입한 그는 당대 유력한 출판업자이자 판화가인 히에로니무스 코크와 친교를 나누며 그로부터 기발한 상상력의 화가 히에로니무스 보슈의 드로잉을 접했다. 그는 이를 통해 비판의식과 신비로운 상징으로 가득한 독특한 화풍을 만들어 나갔다.

그의 비판의식은 당시 네덜란드가 처한 정치적 상황과도 불가분의 관계를 맺고 있었다. 브뤼헐은 1563년 신성로마제국의 황실 거점인 브뤼셀로 이주했는데 당시 그곳은 극심한 정치적 격변을 맞고 있었다. 안트베르펜이 상인들의 도시로 개신교가 우위를 점하고 있었던 데 비해 브뤼셀은 구 귀족의 근거지로 가톨릭 세력의 수중에 놓여 있었다. 특히 카를 5세의 아들로 스페인 왕이었던 필리페 2세는 플랑드르 총독인 알바공작을 사주,가혹한 신교도 탄압정책을 펼치고 있었다.

많은 사람들이 엉뚱한 죄목으로 처형됐고 혹독한 고문으로 불구가 됐다. 그런 숨 막히는 현실 속에서 낙관적인 인간관을 싹 틔운다는 것은 지난한 일이었다. 의식 있는 예술가들이 비관적 운명론자가 되는 것은 어쩌면 당연한 노릇이었다.

브뤼헐의 인간관은 이런 암울한 현실 속에서 형성된 것이었다. 당시 르네상스의 클라이맥스를 막 지난 이탈리아 회화가 인간의 주체성을 강조하고 건강한 신체미를 찬양하고 있을 때 브뤼헐은 부조리함과 운명에 좌우되는 나약한 존재로서의 인간을 풍자적으로 묘사했다. 그가 묘사하는 인물들은 대부분 힘겨운 노동으로 구차하게 삶을 이어가는 농민과 노동자들이었다.

신성한 존재들을 다루는 경우에도 그들을 민중의 틈바구니에 알아채기 어렵게 묘사해 놓았다. '십자가를 진 그리스도'(1564년)에서 예수는 깨알같이 묘사된 군중 속에 안쓰럽게 방치돼 있다.

화가의 눈에 비친 민중은 부조리함 그 자체였다. 그들은 매일 죄를 지으면서도 자신만큼은 결코 지옥에 떨어지지 않으리라고 자기최면을 거는 모순 가득한 존재였다. 부활절과 성탄절에만 교회에 나가면 모든 죄를 용서받을 수 있다고 생각하는 유아적 사고가 그들을 지배했다. 성스러운 봉헌축제의 날에도 신에 대한 예를 갖추기는커녕 흥청망청 먹고 노는 기회로 삼는 '생각 없는 존재'였던 것이다.

코가 비뚤어질 만큼 술에 탐닉하는 자들이나 진하게 사랑을 나누는 커플은 물론이고 춤을 추는 이들에게서조차도 종교적 경건함은 찾아보기 어렵다. 그들은 식탐과 정욕의 노예들처럼 보인다. 화가가 등장인물들을 한결같이 초점 없는 눈동자의 우매한 모습으로 묘사한 데서 그런 의식은 적나라하게 드러난다.

브뤼헐의 회화는 종교개혁기의 특수한 역사적 상황 속에서 탄생한 결과물이라는 점에서 그 시대적 한계가 뚜렷하다. 그러나 민중의 삶을 기록이 아닌 그림을 통해 생생하게 보여줬다는 점에서 그 공로는 남다르다. 무지렁이들을 회화의 주인공으로 내세운 것도 그가 처음이다.

◆ 명화와 함께 듣는 명곡 - 베토벤 교향곡 제6번 '전원'

[그림 속의 선율] 경건한 교회 행사날 춤판을 벌인 사람들, 대체 무슨 일이…
악성 베토벤(1770~1827)은 자연 예찬론자로 '자연을 사람보다 더 사랑한다'고 공언할 정도였다. 그는 처음 귓병을 앓은 32세 때 빈 근교의 시골 마을 하일리겐시타트에서 지냈고 38세 때 다시 이곳에서 요양했다. 교향곡 제6번은 이때 체험한 농촌의 아름다운 풍경과 소박한 농민들의 삶에서 받은 감명을 담은 것이다.

베토벤은 이 작품에 '전원생활의 회상'이라는 부제를 달았는데 낭만주의 시대의 표제음악처럼 회화적 이미지를 염두에 두고 작곡한 것이 아니라 느낌을 담은 것이었다. 따라서 감상자 혹은 연주자가 얼마든지 주관적 해석을 내릴 수 있는 여지를 남겼다. 그렇지만 이 곡은 그의 의도와 상관없이 표제음악을 능가하는 시각적 호소력을 지녔다.

제1악장에는 농촌에 처음 도착했을 때의 유쾌한 감정이 담겨 있는데 초목이 우거진 대자연의 서정적 분위기가 눈앞에 전개되는 듯하다. 시냇가의 정경을 묘사한 제2악장에서는 나이팅게일과 뻐꾸기가 상쾌한 목소리로 감상자를 반긴다. 제3악장은 시골 사람들의 축제 분위기를 담았는데 그 리드미컬한 선율이 브뤼헐의 '농민의 춤'과 절묘하게 어울린다. 제4악장은 폭풍우가 몰아치는 전원 풍경,제5악장은 목동의 노래와 폭풍우가 지난 뒤 감사하는 마음을 표현했다. 1808년 이 작품을 작곡할 때 베토벤은 거의 청력을 잃은 상태였다고 한다. 이 위대한 작곡가는 대자연의 소리를 귀가 아닌 마음으로 들었던 것이다.

▶ QR코드를 찍으면 명화와 명곡을 함께 감상할수 있습니다.




정석범 문화전문기자ㆍ미술사학박사 sukbumj@hankyung.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