신영무 대한변호사협회장은 휴머니스트다. 믿음과 의리를 신조로 67년간 살아온 인생길도 그렇지만 1963년 서울대 법대에 입학해 처음 가입한 동아리가 하필이면 문리대 철학과 교수들이 만든 휴머니스트회였다. 밥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 법을 공부하지만 그럴수록 인생의 의미를 깊게 파고들어야 한다는 일종의 의무감이 발동했던 것일까. 당시 서울대 법대생들의 로망이던 서울대 미대생과 만나 결혼까지 골인한 것도,법대 선후배 사이인 김경한 권재진 전 · 현직 법무장관을 처음 안 것도 이 휴머니스트회라는 모임을 통해서였다.

지난 27일 낮 서울 한남동의 한 밥집.3년 전 종합상사 사장을 지낸 선배와 함께 온 이후 단골이 됐다는 남도 한정식집이다. 자리에 앉자마자 신 회장은 주인 칭찬부터 했다. "안주인이 전북 정읍 출신인데 음식에 대한 철학을 가지고 있어요. 한번 맛보세요. " 역시 휴머니스트답게 음식보다는 사람이 우선이었다. 품평을 듣고 나서 식단을 찬찬히 뜯어 보니 범상치 않았다. "시골 통배추인데 칼을 대면 맛이 없어요. 정읍 황토땅에서 자란 배추로 김치를 담가 3년간 묵혀둔 건데 두부에 싸서 드시면 돼요. " 나긋나긋한 안주인의 멘트까지 버무려지자 시골밥상이 궁중요리로 변해 있었다.

이 정도 뜸을 들였으면 충분할까. 슬쩍 오늘 일정부터 확인했다. "오늘 국회의장을 뵈었어요. " 초장부터 구미가 당겼다. 무슨 일일까. "로펌 등에 취업하지 못한 로스쿨 졸업생들을 변협에서 6개월간 연수하기로 했잖습니까. 법무부가 예산 5억원을 올렸는데 기획재정부에서 전부 깎아버렸죠." 공무원도 아닌 변호사 연수 비용을 국가가 왜 나서서 해주느냐는 논리다. "법조 일원화가 되면 변호사 하다 판 · 검사 할 테고.그렇지 않더라도 크게 보면 변호사는 법치주의를 완성하는 첨병 아닙니까. 2005년에 로스쿨을 도입한 일본만 해도 국고로 1년간 사법연구소에서 로스쿨 졸업생들을 가르쳐요. 국회의장도 어이없어 하시더만… ."

정부 예산 심의는 국회 몫이지만 국회의장을 찾아간 데는 또 다른 이유가 있었다. 박희태 국회의장도 변호사 자격증을 지닌 변협 회원이다. 여야를 합쳐 국회에 회원만 총 62명을 헤아리는 만큼 예산 심의 과정에 기대를 거는 듯하다. 신 회장의 이런 속을 아는지 모르는지 백합은 보글보글 끓는 국물 속에서 콩나물,황태포,호박과 어우러져 흰 자태를 뽐내고 있었다. 백합탕이 상에 오르자 그는 기다렸다는 듯이 또다시 안주인을 치켜세운다.

"이것 좀 보세요. 프로라 다르죠.천천히 먹읍시다. " 프로페셔널로 치자면 신 회장도 둘째가라면 서러워할 사람이다. 그런데 뜻밖이었다. "한때 프로가 될 뻔했죠." 국내 4대 로펌으로 성장한 법무법인 세종을 창업했는데 프로가 아니라니.

하지만 그의 생각은 달랐다. "로펌을 창업해 사무실 매니지먼트(관리)에 빠지면 자기 전문 분야에서 새로운 발전 과정을 따라가지 못해요. 한때는 제가 금융 분야 1인자였다고 자부하지만 사무실(로펌)을 운영하면서 자연히 뒤로 물러났죠."

사진 촬영을 위해 음식을 젓가락으로 집어 달라고 부탁했다. 더덕무침과 찢지 않고 통째 무친 가지가 낙점됐다. "모양도 좋잖아요?" 이 참에 까마득한 과거로 슬슬 여행을 떠나볼까. 그의 이력을 보면 서울대 법대 졸업 이듬해인 1968년 제9회 사법시험에 합격했다. 최병국 국회의원,신승남 전 검찰총장,손지열 전 대법관이 사시 합격 동기다. 이어 육군 법무관을 거쳐 1973~1974년 대전지법 판사.1975년 예일대 로스쿨 입학,법학박사(JSD) 취득에 이어 1980년 11월 난데없이 신영무 법률사무소가 나온다.

20대 후반~30대 초반.젊은 피가 펄펄 끓는 나이여서 가능했겠지만 신 회장은 인생길의 방향을 갑자기 튼다. 국제변호사 2호로 나중에 화우와 합친 법무법인 김 · 신 · 유 창업자 김진억 변호사,김앤장 창업자인 김영무 변호사 등이 그의 멘토였다. 신 회장이 김진억 변호사 사무실에서 아르바이트를 한 적이 있었는데 미국 로스쿨을 나와 국제변호사 길을 걷고 있던 이들 멘토의 조언을 들으며 미국 유학의 꿈을 키웠던 것이다.

"미국 국무부 장학금을 받기로 돼 있었는데 현직에 있는 사람은 못 준다고 해서 판사직을 사표낼 수밖에 없었죠." 당시만 해도 미국에서는 로스쿨 3년 과정인 JD를 거쳐야 변호사시험을 칠 자격을 주었다. 1년 과정인 LLM을 거쳐 뉴욕주 변호사 자격을 취득한 것은 한국 변호사 가운데 신 회장이 처음이었다.

1980년 가을 귀국한 그는 주변의 동업 제의를 뿌리치고 단독 개업했다가 3년 뒤인 1983년 3월 서울 광화문 교보빌딩에서 영어로 신&김이란 간판을 내걸고 창업했다. 이 사무실이 세종로에 있어서 이름을 세종합동법률사무소로 정했다고 한다.

흘러간 얘기지만 당시를 회상하는 신 회장은 가슴이 벅차오르는 표정이었다. 타임머신에 오른 듯 시간 가는 줄 모르고 푹 빠져 있던 과거 여행이 전화벨 소리에 끊겼다. 윤증현 전 기획재정부 장관이었다. 아시아태평양지역 법률가 모임인 로아시아 24회 총회 참석차 방한한 법률가들과 전날 골프를 하다 오랜만에 조우한 윤 전 장관에게서 다시 안부전화가 온 것이다.

공직자로서의 윤 전 장관 평을 물어봤다. "저는 좋게 봅니다. " 말이 나온 김에 요즘 공무원들 평가를 부탁했다. "사실은 장관쯤 되면 어느 정도 인사권을 가지고 소신에 따라 경륜을 펼칠 수 있어야 하는데…. 그럴 수 없는 것 같아 좀 안타깝대요. 인사권도 주고 책임도 지우고 그렇게 해야 하는데…. "

로펌 창업 시절 얘기를 하니 힘이 솟구치는지,아니면 미리 준비해왔는지 신 회장은 업계 현안인 변리사 · 법무사 소송대리 문제로 화제를 끌고갔다. "참,요즘 한 신문이 변리사의 공동 소송대리권에 대해 적극 지지하는 입장인 것 같던데 어떻게 생각하세요. " 기자에게 오히려 물어온다. 어려운 질문이다.

변리사회는 변리사도 법정에서 소송을 대리할 수 있도록 허용해 달라며 국회에 법안을 제출해 놓고 있는데 근거로 제시하는 외국 입법 사례가 영국이다. 그런데 신 회장은 "영국에 가서 시스템을 알아봤다"며 작심한 듯 협회 입장을 펼쳤다. 결론은 영국도 변리사에게 자동으로 소송할 권한을 주지는 않는다는 얘기였다.

"영국은 법정에서 소송하는 바리스터와 고객과 상담하는 솔리스터로 변호사가 나뉘어 있어요. 게다가 특허출원 등록을 변리사가 맡다 보니 분쟁이 생기면 3명의 전문가가 필요해 중소기업이나 개인 발명가에게 부담이 너무 큽니다. 그래서 1990년에 특허카운티법원을 설립해 5만파운드 이하 사건은 변리사에게 소송대리권을 줬어요. 그것도 그냥 준 게 아니고 연수 과정을 거친 뒤 인증을 받도록 했죠.특허침해 사건이나 취소 소송은 중요한 소송이어서 여기에서 빠져요. "

그런데 현실적으로 변리사가 몇 개월 연수 과정을 거쳤다고 해도 바리스터와 붙어 경쟁하는 것은 힘들다. 고객들이 이런 변리사를 찾지 않으니 실효성이 없어 결국 2007년 법 개정으로 관련 제도가 폐지돼 버렸다. 지금은 변리사들의 소송 실력을 강화하는 대안을 모색 중이라는 설명이다.

때마침 시원한 식혜와 배가 디저트로 나와 과열된 분위기를 식힐 수 있었다. 그런데 음식 그릇을 치우고 난 자리를 행주로 훔치는 모습이 너무나 자연스러워 보였다. 동석자들이 모두들 한마디씩 했다. "댁에서 사모님을 많이 도와주시나 봐요. " "제가 밥은 잘 풉니다. 설거지는 싫어하고.사람(부인을 지칭)이 참, 다른 일이 있어도 꼭 밥을 해놓고 가더라고…." 부인 얘기가 나온 김에 기회를 살려갔다. "어떻게 만났습니까. " 검은색 뿔테 안경을 고쳐 쓰는 신 회장의 얼굴이 환해졌다.

"서울대 동숭동 시절에는 법대와 미대가 건물을 마주보고 있었어요. 그래서 법대 미대 커플이 꽤 있습니다. 그때 서울대 공대 출신으로 상공부에 들어간 김모라는 순진한 친구가 하나 있었는 데 그 친구를 위해 흑심을 품고 작전을 짰어요. 뭐냐하면 휴머니스트회 배지를 도안해 달라고 공예과 학생들에게 부탁을 했어요. 배지 도안을 받던 날 이 친구가 저녁도 그럴 듯하게 샀는데 그 이후로는 미대생을 만나지 않더니 그리고는 끝이었어요. 저는 함께 나온 다른 미대생이 마음에 들었어요. 나중에 결혼을 진지하게 생각하면서 그 미대생이 가장 먼저 떠올라 연락하려고 했더니 전화번호를 바꿨는지 연락이 안돼요. 마침 사촌형님이 그 학교 미대 교수로 있어서 전화번호도 받고 해서 정식으로 한번 만나기로 했어요. 그런데 제가 전화한 그 다음날 우리 선배와 선을 보기로 했답니다. 집사람은 저 때문에 아예 선을 안봤다더군요. 제가 만나자고 한 말이 진지하게 들렸던 것 같아요. 필링이 있잖아요. "

맛있는 만남이 두 시간을 넘어가고 있었다. 슬슬 마무리할 때다 싶어 살아오면서 가장 보람으로 생각하는 것 두 개를 꼽아 달라고 부탁했다.

"1981년 미국에서 증권법을 공부하고 와서 막 변호사 개업을 했을 때입니다. 우리나라 증권시장이 4단계로 개방되면서 투자신탁회사들이 외국인 전용 수익증권을 판매했는 데 제가 관여한 게 모델이 돼 바이블처럼 쓰였어요. 우리나라는 먼저 면허를 따는 게 중요해요. 좀 모자라도 먼저 한 사람은 입소문이 나서 마켓을 선점하더라고요. 그래서 법무법인 세종이 잘 됐던 것 것입니다. "

신 회장은 서구식 민주적인 파트너십을 로펌에 처음 도입한 것에도 자부심을 가진다고 했다. "후배들에게 지분을 줘야 내 일처럼 열심히 일합니다. 일정 기간 일한 뒤에는 유학을 보내주고,갔다 와서 1,2년 지나면 파트너가 되라고 적극 권했어요. 당시만 해도 파트너가 뭔지도 모르던 때였어요. " 후배 변호사들에게도 할 말이 많은 것 같았다. "우리나라 변호사가 1만1000명이지만 2000명이 유학했고,1000명이 외국 변호사 자격증을 땄어요. 이런 나라는 세계에 없어요. 미국변호사협회인 ABA에서 '원한다면 1만1000명 전부를 협회에 가입시켜 주겠다'는 제안을 했어요. 우리 위상이 얼마나 올라왔습니까. 젊은 변호사들은 역발상을 해야 합니다. 돈 못 번다고 한탄할 게 아니라 자꾸 봉사하고 크게 보고 하다 보면 성공할 수 있습니다. "

▶1944년 충남 당진 ▶서울고 서울대 법과대학 ▶제9회 사법시험 합격 ▶대전지방법원 및 홍성지원 판사 ▶미국 예일대 로스쿨 ▶법학석사(LLM),법학박사(JSD) ▶법무법인 세종 대표변호사 ▶금융발전심의위원회 위원 ▶국무총리 정책자문위원회 위원 ▶삼성고른기회장학재단 이사 ▶한미재계회의 위원 ▶한국중재인협회 부회장 ▶환태평양변호사협회(IPBA) 한국위원회 회장 ▶대한변호사협회장


◆ 신영무 회장의 단골집 우리집
정읍산 된장 · 고추장에 3년 묵힌 통배추 보쌈김치 '일품'


통배추로 담근 보쌈김치와 산채나물을 기본으로 한 채식 위주의 남도 한정식집이다. 주재료와 된장 고추장 등 양념은 대부분 전북 정읍에서 직접 가져다 쓴다. 김치는 가을배추로 1년에 한 번 담가 놓았다가 3년간 숙성시켜 쓴다. 삼합에 들어가는 돼지고기도 토종만 고집하며,백합은 부안산이다. 주메뉴는 정식이다.

점심은 갈비찜정식(2만7000원),보리굴비정식(2만7000원),민어구이정식(3만원),남도한정식(1만7000원,3만원) 등이 있다. 저녁은 진달래 한정식(4만5000원)과 민들레 한정식(7만원) 2가지이며,쫄깃한 간재미찜에 백합탕 능이버섯 갈비살볶음 연포탕 등 제철 음식이 더 나온다. (02)379-1150


김병일/이고운 기자 kbi@hankyung.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