뭐든 흔해지면 힘을 잃는다. 언어도 그렇다. 천금같은 무게를 지닌 말인데도 불구,되풀이되다 보면 본연의 뜻이나 힘을 잃고 상투어처럼 되기 일쑤다. 정치인을 비롯 이름깨나 있다는 이들의 '반성한다''사과한다'는 대표적이고 사고때면 나오는 '안전불감증'과 '인재(人災)'도 마찬가지다. 같은 얘기가 반복되는 건 문제의 뿌리가 뽑히지 않고 대책이 제대로 세워지지 않기 때문이다.

그런데도 원인은 간 데 없이 '노상 반복되는 뻔한 지적' 정도로 여겨지는 듯하다. 안전불감증이란 단어에 아무 느낌도 갖지 못하는 불감증에 걸린 것처럼 보일 정도다. 안전의식에 관한 한 자유로운 사람은 없을 것이다. 자동차 전용도로에선 승용차 뒷좌석에서도 안전벨트를 매야 한다는 사실을 알면서도 실천하는 사람이 적은 것만 봐도 그렇다.

그러나 하루 평균 250만명이 이용하는 광역철도의 총책인 코레일 사장이 KTX 사고 후 "사람도 안 다쳤는데 무슨 큰 일이라고" 했다는 건 차원이 다른 문제다. 전국 4600여 곳에 무려 346만마리를 매몰,침출수 배출에 따른 문제가 있을 수 있다는 사실이 알려진 상황에서 환경부 장관이 "매몰만 잘했으면 문제없다. 침출수 배출은 곧 식수 오염이란 공식은 잘못됐다,복장 터진다"고 했다는 것도 같은 맥락으로 볼 수 있다.

이명박 정부 초 광우병 불안에 따른 촛불 시위가 확대된 원인은 극히 간단했다. 확률이 아무리 낮아도 발병 가능성이 있는 만큼 '그게 나면,내 식구면 어떻게 하느냐'라는 항변 앞에 논리적 설명은 힘을 쓰지 못했다. 위생 시설보다 위생 관념이 문제라고 하거니와 안전 시설 못지않게 중요한 건 안전을 다루는 이들의 의식과 빠르고 분명한 대책이다.

잦은 사고는 사람들의 불안을 가속시킨다. 뿐만아니라 불안은 전염된다. 무심코 있던 사람도 옆에서 안절부절 못하면 덩달아 불안하고 초조해 진다.

열차 사고는 대형 사고로 이어질 가능성이 높다. 식수원 사고 역시 마찬가지다. 불의의 사고는 엄청난 후유증을 남긴다. 삼풍백화점과 성수대교 붕괴,대구지하철 화재 사건의 피해자 및 가족은 평생 트라우마에 시달리며 살아갈 테지만,사고와 직접 관계가 없는 사람도 당시를 떠올리면 호흡이 가빠지고 가슴이 두근거리면서 맥박이 빨라진다.

안전관리의 선구자로 꼽히는 허버트 윌리엄 하인리히는 '대형 사고의 발생 배경엔 330건의 크고 작은 사고가 있다'고 주장했다. 모든 사고엔 조짐이 있고 작은 사고에 대한 방임이 큰 사고로 이어질 수 있다는 얘기다. 안전수칙에 사소한 건 없다. 구제역 매몰과 열차 사고 모두 감추고 변명하기에 급급하기보다 확실한 원인을 알아내고 분명한 상황을 공개하고 대안을 내놓는 게 순서다.

실효성 있는 대책을 강구해야 하는 건 지난 주말 청와대를 비롯 주요 국가기관과 포털사이트,금융기관 등 40개 사이트에 발생한 디도스(DDoS · 분산서비스 거부) 공격 역시 마찬가지다. 2년 전과 같은 대규모 피해가 없었다고 안도하다간 언제 다시 심각한 사태가 벌어질지 알 길 없다. 국회에서 낮잠 자고 있는 좀비PC법 처리가 시급한 이유다.

구제역 침출수로 인한 식수원 안전에 대한 불안과 잦은 열차사고는 안그래도 물가 상승으로 힘든 사람들의 가슴에 두려움에 따른 분노를 일으킬 수 있다. 불의의 사고를 예방하려면 일반인의 안전의식 강화가 우선이겠지만 무엇보다 장관과 경영자 등 조직의 책임자가 "사소한 일을 가지고" 하는 식의 안전불감증에서 벗어나야 한다. "우리가 아니고 저쪽에서 잘못해서" 식의 핑계를 대지 말아야 하는 것도 물론이다. 사람을 넘어지게 하는 건 산이 아니라 발 앞의 돌멩이이고,둑은 작은 구멍 하나로도 무너진다. 책임 규명도 대책 마련도 없이 시간 가기만 기다렸다간 영영 수습하기 힘든 사태에 직면할 수 있다.

박성희 수석 논설위원 psh77@hankyung.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