가장 흥미진진한 편명으로 손꼽히는 ≪사기≫의 '여불위열전'에 따르면 여불위는 한(韓)나라 출신의 상인으로 여러 곳을 오가면서 물건을 싸게 사들여 비싸게 되팔아 천금이나 되는 돈을 모은 상인이다. 유달리 사람을 좋아한 그는 인재에 대한 투자야말로 영원하다고 믿었다.

여불위가 활동한 시기에 진나라의 후계구도는 이랬다. 진나라 소왕(昭王)의 태자가 죽고 안국군(安國君)이라는 둘째 아들이 자리를 이어받아 효문왕이 된다. 안국군에게도 아들이 20여명이나 있었는데 정부인인 화양부인(華陽夫人)에게는 아들이 없었고 총애받지 못한 하희(夏姬)란 첩실에게서 태어난 자초(子楚)가진 나라를 위해 조나라에 볼모로 가 있었다. 자초는 재물도 없었고 이렇다 할 인맥도 없어 실의에 빠진 나날을 보내고 있었다.

여불위가 조나라 수도 한단에 물건을 사러갔다가 자초를 보더니 "이 진귀한 재물은 사둘만하다(奇貨可居)"며 그에게 가문을 크게 만들어 줄 수 있다고 말했다. 그러자 자초는 웃으면서 "먼저 당신 가문을 크게 만든 뒤에 내 가문을 크게 만들어 주시오"라고 비꼬았다. 여불위는 "당신이 모르는 모양인데, 제 가문은 당신 가문에 기대어 커질 것입니다”라고 응수했다.

여불위는 자초에게 500금이나 되는 거금을 사람 사귀는 비용으로 주고,자신은 500금으로 진기한 물건과 노리개를 사 서쪽 진나라의 화양부인을 만나러 떠난다. 화양부인에게 선물을 모두 바쳐 마음을 사로잡은 여불위는 자초를 추천한다. 또 화양부인의 언니를 부추겨 화양부인이 자초를 양자로 삼아 후사를 이어받게 했다. 화양부인 역시 손해볼 것이 없다고 여기고 안국군에게 한가한 틈을 타 자초를 후사 자리에 세워달라고 눈물로 호소하니 안국군은 자초에게 많은 물품을 보내고,여불위에게는 잘 보살피도록 부탁까지 했다. 결국 진나라의 태자가 된 자초는 제후국에 이름을 떨치게 됐다.

여불위는 여기서 멈추지 않았다.자신의 입지를 굳히기 위해서는 좀더 확실한 대비가 필요했다. 그는 한부호의 딸을 첩으로 삼았는데,어느 날 자초를 집으로 초대해 술을 마시고 있었다. 자초가 그녀를 보더니 한 눈에 반해 달라고 했다. 마침 그녀는 여불위의 아이를 배고 있었다. 여불위는 속으로 치미는 화를 가라앉히고 자초에게 그녀를 바쳤다. 그러고는 그녀에게 절대 임신한 사실을 입밖에 내지 말도록 했다. 그렇게 해서 낳은 아이가 정(政)이었다. 자초는 기쁜 마음에 그녀를 부인으로 세웠고,여불위는 속으로 쾌재를 불렀다.

그러던 중 진나라 소왕이 눈엣가시인 조나라를 공격했다. 조나라는 볼모로 와 있던 진나라 왕자 자초를 죽이려고 했다. 그러자 다시 여불위가 금600근으로 관리를 매수, 자신의 부인과 아들 정은 남겨두고 자초와 함께 진나라로 빠져나갔다. 그러나 부호의 딸인 부인을 함부로 죽일 수도 없었다. 그로부터 6년 후 소왕이 죽고 안국군이 왕위에 올랐다. 자초가 태자가 되자 자초의 부인과 정도 함께 진나라로 돌아올 수 있게 됐다.

안국군이 1년 만에 죽고 자초가 왕이 됐으니 바로 장양왕이다. 그런데 장양왕도 3년만에 죽자 13세의 나이로
정이 왕위에 오르게 된다. 이때부터 여불위는 상국(相國), 즉 재상이 되고 중보(仲父)라고 불리면서 아버지에 준하는 예우를 받는다. 그런데 문제는 그 다음부터다.

여불위가 나이 어린 진왕 정 몰래 사사로 이태후와 정을 통하게 됐다. 식객이 1만명이나 됐으나 누구도 감히 소문을 내지 않았다. 진왕이 성년이 돼도 둘의 애정행각은 그칠 줄 몰랐다. 발각될 것이 두려운 여불위는 음경이 큰 노애를 찾아 집안일 거드는 자리를 주고는 음탕한 음악을 연주하며 그의 음경에 오동나무 수레바퀴를 달아 걷게해 음란한 태후의 마음을 흔들어놓았다. 작전은 성공이었다. 태후가 노애를 갖고 싶어하자 여불위는 노애를 그녀에게 바치면서 거짓으로 성기를 제거하는 부죄(腐罪)를 받게 해 환관으로 만들어 태후가 곁에 두고 마음껏 즐기도록 했다. 태후는 마다하지 않았다. 둘 사이에 아들을 둘이나 낳았다. 여불위는 다시 그녀와 모략을 꾸며 진왕이 죽으면 뒤를 잇게 하자고 했다.

결국 여불위는 모든 것을 알게 된 진왕 정에 의해 관직에서 쫓겨나게 됐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부와 권력을 손
에 쥔 여불위의 집은 방문객들로 문전성시를 이루는 것이 아닌가. 그것이 화근이었다. 그는 불안감을 느낀 진왕이 보낸 편지를 받고 자신의 죄를 알고는 독주를 마시고 자살했다.

김원중 건양대 중국언어문화학과 교수 wjkim@konyang.ac.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