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 과장은 7월 중순 내내 바빴다. 여름휴가를 앞두고 숙소를 잡기 위해서였다. 경비를 아끼자면 회사가 갖고 있는 리조트 회원권을 이용하는 게 최고다. 문제는 경쟁률이 높다는 점.할 수 없이 회원권을 관리하는 총무부의 이 대리에게 매달렸다. 평소의 친분을 들먹이며 "한번 봐주라"고 읍소했다. 반응이 신통치 않자 '점심공세'를 펼쳤다. 이 대리를 따로 모시고,이 대리와 함께 근무하는 입사동기 과장을 같이 모시기도 했다.

결과는 성공적이었다. 다음주 3박4일간 휴가를 편안하게 다녀올 수 있게 됐다. "휴가 때만 되면 을(乙)이 돼 이 대리 같은 총무부서 사람을 갑(甲)으로 모셔야 한다"는 게 김 과장의 농반진반(弄半眞半)이다.

김 과장,이 대리들은 '갑을관계'에서 산다. 거래처와도 그렇거니와 사내에서도 그렇다. 때론 '갑'이 되기도 하고,때론 '을'이 되기도 한다. 직급이 낮다 보니 을이 되는 경우가 훨씬 많다. 경우에 따라선 '병(丙)'이나 '정(丁)'으로 내려앉기도 한다.

◆사내선 재무부서가 으뜸

기업 최고경영자(CEO)들은 틈만 나면 "여러분 모두가 하나하나 소중한 직원이고 모두가 평등한 관계"라고 강조한다. 실제는 다르다. 부서간에도 서열이 있다. 평상시 제일 센 부서는 돈줄(예산)을 쥐고 있는 재무 · 회계 · 총무 부서다. 중소기업에 다니는 김성진 대리(30).그는 기획팀에서 잘 나가는 젊은 사원이다. 톡톡 튀는 아이디어에 실현가능한 기획안을 뚝딱 만들어 낸다. 그런 김 대리에게도 어려움이 있다. 다름 아닌 예산따기다. 중소기업이다 보니 기획자가 예산담당자를 설득해 관련 비용을 받아내야 한다. 그러자면 그 프로젝트가 회사를 위해 얼마나 중요한지 몇번이고 설명해야 한다. 김 대리는 "아무리 그럴 듯한 프로젝트를 기획하더라도 총무팀에서 돈을 안 주면 말짱 헛일"이라며 "프로젝트 비용을 받기 위해 담당 직원을 근사한 레스토랑에 모시기도 한다"고 전했다.

부서간 갑을 관계는 일시적으로 변하기도 한다. 인사철엔 인사팀이 으뜸이다. 회사 내 사건 사고가 터졌을 땐 감사팀이 힘을 준다. 신제품 출시 즈음에는 홍보 · 마케팅 부서의 목소리가 커진다. 요즘 같은 휴가철엔 콘도 회원권을 관리하는 관리부서가 '일시적 갑'으로 등극하기도 한다.

◆'영원한 갑'은 없다

사내에선 '영원한 갑'이 없다. 대기업 계열사에 다니는 이한경 대리(33)도 그런 경우다. 그의 첫 보직은 인사팀이었다. 인사철이면 하늘 같은 부장들도 이 대리를 불러 "담배 한 대 피우자"거나 "요즘 뭐 먹고 싶냐"고 묻곤 했다. 겉으론 "부장님께서 왜 이러십니까"라고 어려워 했지만,내심으론 이런 상황을 즐기곤 했다.

이렇게 5년이 지난 뒤 이 대리는 영업팀으로 발령받았다. 특별한 실수가 있어서가 아니다. "영업을 해봐야 회사를 알수 있다"는 인사담당 상무의 세심한 배려에서였다. 인사 발령과 함께 이 대리의 신분도 갑에서 을로 바뀌었다. 부장들이 지나갈 때마다 한켠에 비켜서서 공손한 자세를 취해야 한다. 이 대리는 "인사팀 생활 5년 만에 갑의 습성이 몸에 뱄다는 것을 부서를 옮겨 보니 느낄 수 있었다"며 "을로 변신하는 과정이 쉽지만은 않았다"고 말했다.

공기업에 다니는 박모 과장(38)도 비슷한 경험을 했다. 그는 오랫동안 지사와 현장을 관리하는 업무를 해왔다. 그가 지방에 내려갈 때마다 지사직원들이나 머리가 희끗한 현장 소장도 그를 '상전'처럼 모셨다. 박 과장이 "왜 이러시느냐"고 손사래를 쳤지만 그들은 막무가내였다.

박 과장은 올해 초 전주 지사로 발령났다. 순환근무 원칙에 따라서였다. 박 과장은 누구보다 적응이 빨랐다. 본사에서 내려오는 손님이 있으면 직급을 불문하고 깍듯이 모신다. 박 과장은 "우리 회사에서는 순환보직이니까 사내에서 영원한 갑이 없다는 걸 모두 잘 알고 있다"며 "그러다 보니 '을 같은 갑'이 많다"고 전했다.

◆어려도 힘 있으면 甲

대기업에 근무하는 윤모 과장(33)은 작년 여름 띠동갑 어린 대학생을 갑으로 모셔야 했다. 기획부에서 일하는 그에게 어느 날 인턴 한 명이 배치됐다. 스무 살이 갓 넘은 대학생이 인턴으로 발탁된 것도,기획부에 배치된 것도 이례적이었다. 오랜 해외생활로 한국말을 잘 못 알아듣는 여학생이었다.

의아해하는 그에게 부장을 통해 은밀한 지시가 내려왔다. "중요한 거래처의 사장 딸이니까 알아서 잘 하라"는 것.윤 과장은 "점심 메뉴를 고를 때마다 인턴 마음에 안 들까봐 신경이 쓰였다"며 "일은 못 하면서 일거리를 달라고 조르는 인턴에게 잡일들을 '중요한 일'로 포장해서 넘기느라 나름 마음고생이 심했다"고 회고했다.

그래도 윤 과장은 양반이다. 중견기업의 정모 차장(41)은 사람을 잘못 알아봤다가 경을 칠뻔 했다. 신입사원이 들어 왔는데 태도가 건방지기 짝이 없었다. 버릇을 고쳐주기로 마음먹은 정 차장은 신입사원의 눈에서 눈물이 쑥 빠질 정도로 시시콜콜 업무태도를 나무랐다. 다음날 임원이 정 차장을 불렀다. 그리고는 "어제 야단친 신입사원이 회장님의 막내 아들이네"라고 넌지시 알려줬다. 혼내는 것은 아니지만 알아서 하라는 눈치였다. 그 다음부터 정 차장은 신입사원 앞에서 '영원한 을'이 된 것은 물론이었다.

◆'진상 갑'을 피하라

모든 갑을 관계가 나쁜 것만은 아니다. 문제는 힘이 있다는 이유로 무리한 부탁을 수시로 하는 '진상 갑'들이다. 힘없는 을들은 마음 속으로 '당신 이거 권한남용이야!'라고 외쳐보는 수밖에 없다.

유통업체에 다니는 박모 과장(37)은 툭하면 거래처 간부들로부터 전화를 받는다. "지금 아내와 대리점에 와 있는데 물건값을 얼마나 깎아줄 수 있느냐"거나,"공짜로 제품을 보내달라"는 내용이다. "계열사 호텔을 무료로 이용하게 해 달라"는 전화도 많이 받는다. 박 과장은 "쉬는 날 이런 전화를 받으면 짜증이 몰려오지만 그래도 업무를 위해서 가능한한 민원을 해결하려고 노력한다"고 말했다.

제조업체에 다니는 이들에게 대형 할인마트나 백화점은 갑이다. 전자제품 생산업체에 다니는 한모 과장(40)도 그렇다. 한 과장은 매일같이 할인마트를 방문해 제값을 받는 게 일이다. 그는 "유통업체에서 억지 프로모션을 강요하면서 제품값을 30~40%씩 깎으려 들 때면 울컥하지만,'싫으면 제품 뺄까?'라는데 어쩔 도리가 없다"며 "나중에 그쪽 업체 관계자들과는 사돈도 맺지 않을 생각"이라고 분개했다.

이상은/이관우/이정호/김동윤/이고운/강유현 기자 selee@hankyung.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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