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녹색 경제와 경쟁 클러스터'라는 주제로 열린 조찬포럼에서 주제 발표를 맡은 윌리엄 밀러 스탠퍼드대 경영대학원 석좌교수는 한국의 녹색 성장 허브 가능성을 집중 조명했다. 밀러 교수는 "녹색 성장을 위한 한국의 기술 기반은 충분하다고 판단된다"며 "한국이 기술을 비즈니스화하는 데 역량을 집중한다면 세계 녹색 성장의 중심 국가가 될 수 있다"고 평가했다.

그는 한국이 참고할 만한 녹색 성장 허브 모델로 미국 캘리포니아주 샌디에이고시의 '바이오테크 클러스터'를 꼽았다. 밀러 교수는 "한국처럼 정부 역할이 큰 나라에서는 자생적으로 클러스터를 구축한 실리콘밸리보다 정부 주도의 샌디에이고 클러스터가 더 적절한 모델이 될 것"이라고 말했다.

◆세계는 평평하지 않다

밀러 교수가 한국의 녹색 성장 허브 국가 가능성에 대해 언급하면서 가장 강조한 것은 '클러스터'였다. 그는 "토머스 프리드만은 그의 저서에서 '세계는 평평하다'고 했지만 특정 지역의 집중적 클러스터가 여전히 유효하다"며 "세상은 평평하지 않고 와플 모양"이라고 주장했다.

즉 인터넷과 실시간 통신의 발달로 세계가 평평해지리라고 예측하는 것과는 달리 첨단 산업의 혁신적인 변화는 특정 클러스터의 주도에 의해 가능하다는 것이다. 그는 정보기술(IT),바이오,항공우주 등 주요 산업별 클러스터를 표시한 미국 지도를 보여주면서 "와플처럼 튀어나온 이들 클러스터 간 네트워크를 통해 산업과 국가 전반에 걸쳐 혁신이 이뤄진다"며 "클러스터가 복수로 존재할수록 경쟁에 의해 혁신이 앞당겨지고 허브로서 가능성이 그만큼 커진다"고 설명했다.

◆혁신 클러스터의 14가지 조건

밀러 교수는 새로운 산업 분야의 혁신적인 클러스터는 기업가 정신을 촉진하는 사회적인 분위기에서 형성된다는 점을 지적했다. 그는 혁신 클러스터의 14가지 조건을 구체적으로 언급했다. △지식 집약 △열린 비즈니스 기회 △대학과 연구기관,기업의 협업 △우호적인 정부 정책 △결과에 따라 평가받는 실적주의 시스템 △글로벌 연계 △다양한 클러스터 △변화를 위한 리더십 △정부와 기업,비영리기구들 간의 협력 △특화된 비즈니스 서비스 인프라 △높은 수준의 삶 △지식집약적인 벤처캐피털 △유연하고 집약된 소셜 네트워크 △실패를 용인하고 새로운 기회를 주는 분위기가 그것.

이에 대해 토론에 참가한 신의순 연세대 경제학과 교수는 "한국의 경우 특히 실패한 자에게 두 번째 기회를 주는 것이 절실하다"고 말했다. 실패를 해도 다시 일어설 수 있다는 확신이 없으면 그린 테크놀로지라는 실패 확률이 높은 새로운 분야에 아무도 도전하려고 하지 않을 것이기 때문이다.

◆실리콘밸리도 그린(Green)으로 간다

밀러 교수는 첨단 IT의 최첨병으로 알려진 실리콘밸리의 기업들도 최근 녹색 성장 전략을 짜고 있다고 지적했다. 그는 "라디오 진공관에서 시작한 실리콘밸리는 반도체 등 IT 하드웨어를 거쳐 인터넷 비즈니스로 성공적으로 옮겨왔고 이제 청정기술 중심 지역으로 탈바꿈하고 있다"고 말했다.

실리콘밸리는 미국 내에서 청정기술의 20%를 차지할 정도로 가장 규모가 큰 청정기술 유치 기점이 됐다. IT를 주도했던 실리콘밸리가 녹색 성장분야에서도 유효한 경쟁력을 가질 수 있는 것은 관련 기술과 기업들이 모여 있는,이른바 집중적 클러스터의 효과 때문이라는 것.밀러 교수는 "실리콘밸리에서 청정기술 관련산업이 2007년 94%나 성장했고 올해도 빠르게 성장하고 있다"며 "클러스터는 한번 형성되면 생물처럼 경쟁과 자체 혁신에 의해 산업 변화를 주도하게 된다"고 덧붙였다.

◆기술을 비즈니스화해야


밀러 교수는 한국이 미국 실리콘밸리와 샌디에이고 클러스터 사례를 참고해 녹색 성장 클러스터를 구축할 수 있다고 전망했다. 실리콘밸리의 혁신적인 아이디어와 샌디에이고의 정부 정책이 한국에 시사점을 줄 것이란 지적이다. 샌디에이고는 1980년대 후반에 시작해 불과 20여년 만에 세계에서 3번째로 큰 바이오 테크놀로지 클러스터를 만들었다. 이날 조찬포럼의 사회를 맡은 김석준 과학기술정책연구원 원장은 "샌디에이고 사례에서 가장 중요한 것은 정부가 앞장서 클러스터 조성에 필요한 환경을 만든 것"이라고 말했다.

이와 관련,밀러 교수는 그는 "정부의 관여없이 대학을 중심으로 자발적으로 성장한 실리콘밸리는 환경면에서 보면 최선의 장소는 아니다"라며 "한국의 경우 정부 역할이 컸던 샌디에이고 사례를 주목해야 할 것"이라고 설명했다.

클러스터를 만들 만큼의 기본적인 기술력은 한국이 충분히 갖췄다는 것이 밀러 교수의 판단이다. 하지만 기술을 상용화하는 부분이 취약하다고 지적했다. 밀러 교수는 "한국의 기업들이 제조업 분야에서 핵심적인 기술이나 특허를 보유한 경우가 많다"며 "하지만 이를 비즈니스화하는 것에서 아직 부족하다"고 강조했다. 토론에 참여한 이정협 과학기술정책연구원 연구위원은 "기술을 비즈니스화하기 위해선 정부 정책도 이를 지원해야 한다"며 "정부의 기업가 정신이 필요한 이유"라고 말했다.

임원기 기자 woonkis@hankyung.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