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뭐 하노 자슥아.학교도 안 가면서….퍼뜩 내려오래이."

하숙집 전화기 너머로 아버지의 목소리가 쩌렁쩌렁 울려댔다. 1970년대 중반,박종우 삼성전기 사장은 하숙을 하며 대학에 다니고 있었다. 유신정권 시절 휴교를 밥먹듯 되풀이하던 때였다. 부산에 계시던 아버지는 방학은 물론 휴교 소식도 귀신처럼 알고 불러내렸다. 건설업을 하던 아버지를 도와 고등학생 때부터 공사장 일을 해 왔기 때문에 어느 정도 이골이 나 있었지만 그는 공부가 하고 싶었다. 하지만 아버지 고집을 당할 수는 없었다.

부산에 내려가면 일도,휴식도,밥먹는 것도 모두 공사장에서 일하는 사람들과 함께했다. 그래서 지금도 설계부터 건축까지 집짓는 것은 자신있다고 말한다. 하지만 그때는 달랐다. "아버지께서는 항상 일꾼들과 함께 노동을 하며 생활하는 것이 공부라고 했지만 그때는 이게 무슨 공부냐고 생각했다"고 회고했다.

그 싫었던 건설현장의 경험이 훗날 경영자 박종우에게 귀중한 자산이 됐다. 그래서 지금도 문제가 생기면 현장으로 내려간다. 현장에 답이 있다는 사실을 알기 때문이다. "밑바닥을 이해해야 전체를 볼 수 있으며,그걸 모르는 CEO는 지시를 못합니다. 설령 지시를 하더라도 엉뚱한 방향을 제시할 가능성이 높아요. "

현장형 CEO 박종우가 삼성전자와 인연을 맺은 것은 절묘한 시점에 걸려 온 진대제 전 삼성전자 사장(당시 상무)의 전화 한통 때문이었다.

◆IBM을 떠난 엔지니어의 꿈

박종우는 1984년 연세대에서 전기공학 박사학위를 딴 뒤 미국으로 건너간다. 전공을 바꿔 전자공학을 더 공부하기 위해서였다. 장학금과 생활비를 주겠다고 한 퍼듀대를 택했다. 그곳에서 전자공학 박사학위까지 따냈다. 그는 교수직보다는 기업인 IBM을 택했다. 공부하는 아내,그리고 두 딸을 위해 돈을 벌기로 한 것이다. 그는 "반도체를 계속 연구할 수 있다는 것과 함께 장기적으로 더욱 성장할 회사라고 생각해 대우가 가장 좋았던 코닥 대신 IBM으로 가게 됐다"고 말했다.

1988년 IBM 입사 후 2년여가 흘렀다. 256메가 D램 개발팀에서 일하고 있던 박종우에게 뜻밖의 상황이 생겼다. IBM이 연구소를 통합하면서 가족과 떨어지게 된 것이다. 주말이면 비행기를 1시간30분 정도 타고 날아가 아내와 아이들을 만나야 했다. 그런 생활이 1년6개월가량 흘렀다. 그는 점점 지쳐갔다. 이런 생활을 계속할 수 없다고 판단해 아내의 학업을 중단시키고 뉴욕 북부의 이스트피시킬에 있던 회사 근처에 집을 사기로 했다.

집을 보고 계약하기로 한 당일 박종우는 왠지 그날 계약을 하기 싫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는 "만약 그날 계약했더라면 한국에 들어오지 않았을 것"이라고 말했다.

그날 저녁,집에서 이런저런 생각을 하고 있는데 전화벨이 울렸다. 삼성에서 반도체 개발을 담당하고 있던 진 상무였다. 두 사람은 반도체 원청업체(IBM)와 하도급업체(삼성)의 거래 관계 속에서 친분을 쌓은 사이였다. 진 상무는 대뜸 "미국에 있으면 뭐 하나,한국에 빨리 나와 함께 일하자"고 말했다. 마침 가족과 집 문제로 고민하던 박종우에게 솔깃한 얘기였다.

박종우는 "삼성 가면 뭘 시킬건데요"라고 물었다. 진 상무는 국가경제가 어떻고 반도체산업이 어떻고 등의 거창한 얘기로 그의 마음을 움직이려고 했다. 하지만 그런 얘기는 전혀 귀에 들어오지 않았다.

다시 물었다. "아니 그러니까요. 목적도 없이 사람을 데려가면 뭐 할 겁니까. 삼성전자에서 제가 할 수 있는 일이 뭔지 알아야 가든지 말든지 하지요. " 이 말에 진 상무는 "차세대,차차세대 반도체를 개발하는 팀을 만들 거야.그걸 맡아주면 안 되겠나"라고 제안했다.

"생각해보겠습니다"라며 전화를 끊었지만 마음은 이미 삼성으로 향하고 있었다. 영락없는 엔지니어였던 박종우는 개발팀을 이끌어달라는 말에 생각이 바뀌기 시작한 것이다.

고민이 없었던 것은 아니다. "IBM에서 잘나가는 연구원이었는데 그 자리를 버리는 것을 고민한 것이 사실이다. 하지만 내가 기여할 수 있는 게 있고 회사의 미래가 있다는 게 삼성으로 옮긴 이유였다. "

◆기다림의 미학

"정규직을 시켜주세요. " 1992년 박종우가 한국행을 결심하면서 삼성에 내건 유일한 조건이었다. 삼성 공채로 입사한 사원과 똑같은 정규직으로 해달라는 것이었다. 기왕 입사할 거라면 '철저하게 삼성 사람이 되겠다'는 생각에서였다. 회사 측에서는 "계약직보다 월급이 훨씬 적을 것"이라며 만류했지만 굽히지 않았다.

그렇게 정규직 '이사' 직함을 달고 당당하게 삼성전자 반도체 개발팀에 합류했다. 하지만 출발은 순탄치 않았다. 우선 첫달 받아든 월급 명세서가 그를 깜짝 놀라게 했다. 월급봉투에 찍힌 금액은 고작 180만원이었다. IBM에서 받은 연봉이 7만달러였으니 대략 한 달에 500만원 정도를 받던 터였다. 그뿐이 아니었다. 기대했던 차세대 반도체 개발 업무도 당장은 주어지지 않았다. 대신 16메가D램 개발 업무를 맡게 된 것.약간의 실망과 답답함도 느꼈다.

직위도 문제였다. "이사인 줄 알고 왔는데 어느날 보니 정확히 이사보더라.삼성의 복잡한 직급을 계산해 보니 수십년 걸려야 사장을 할 수 있겠다는 생각이 들었다"고 말한다.

하지만 박종우는 조급해하지 않았다. 주어진 현실이라면 받아들이고 집념을 갖고 미래를 준비하자는 게 그의 생활철학이었다. 마음은 착잡했지만 티도 내지 않고 차세대 반도체 개발을 위한 준비를 하기 시작했다. 미국 유학 때도 어머니의 병환,집안의 반대로 4~5년을 기다렸지만 기어이 유학의 꿈을 이룬 그였다.

당시 반도체 개발지원팀을 맡고 있던 최창호 전무가 그에게 한 말은 아직도 그의 머릿속에 생생하다. "일 열심히 하다 보면 어느날 올라가. "이 말이 현실화되는 데는 그리 오랜 시간이 걸리지 않았다.

◆1기가D램의 개발 성공과 승승장구

삼성에 입사한 지 1년쯤 지나 1기가D램 개발이라는 업무가 주어졌다. 그때 한 선배는 "꼭 성공시켜라.회장님이 상도 주고 승진도 시켜 줄 거야"라며 독려했다. 물론 그것도 하나의 동기가 됐다. 하지만 더 중요한 것은 열정이었다. 스스로 목표를 정하고 도전하는 열정.박종우는 아예 기흥사업장 앞에 집을 얻었다. 출퇴근 시간을 줄이기 위해서였다. 하지만 그 집에도 며칠 들어가지 않았다. 회사에서 지내는 시간이 더 많았다.

그리고 2년 뒤인 1996년,그는 세계 최초로 1기가D램 개발에 성공했다. 그 결과 1계급 특진해 상무를 달았다. 그리고 2년 후 전무를 달고 메모리 개발 책임자가 됐다. 그는 "삼성은 진짜 빠르다,그래서 성장하는구나 하고 느낀 게 그 즈음이었다. 성장한 후배들이 선배들의 자리를 대신하고 또 다른 후배들이 올라오고….이건희 회장이 얘기한 인재 중시 경영이 말만이 아니라는 것을 체험한 시기였다"고 돌아봤다.

◆적을 고객으로 바꾼 친화력

박 사장의 친화력은 유명하다. 한 임원은 "이상하게 그를 만난 사람들,심지어 사장을 모시는 직원들까지 모두 편하게 생각한다"고 말할 정도다.

2000년 초 일이다. 삼성전자는 당시 프린터 사업을 전략적으로 육성하기로 결정했다. 사내에서 프린터가 어떻게 전략산업이 될 수 있느냐는 문제 제기도 있었지만 특유의 친화력과 사업에 대한 비전으로 전사적 협력을 이끌어냈다.

일본과의 특허문제도 친화력으로 해결했다. 삼성전자는 후발 주자이기 때문에 특허 사용료를 요구하는 수많은 기업에 시달리던 시절이었다. 어느날 한 일본 기업이 특허료를 요구하기 위해 한국에 왔다. 박 사장은 특유의 입담과 지식,여기에 폭탄주 문화까지 동원해 특허협상팀을 자신의 친구로 만들었다. 그 결과는 유리한 협상 결과로 이어졌을 뿐 아니라 이 일본 회사에 납품까지 하는 쾌거를 이뤘다. 박 사장은 "지금도 이 일본 친구들과는 정기적으로 만나고 있다"고 했다.

이런 친화력에 대해 그는 "어릴 때 우리는 한집에 21명이 살았다. 누나 둘,동생 셋,고모와 삼촌까지 함께 모여 사는 과정에서 쌓인 사회성이 지금도 사람들과 자연스럽게 소통하고 교류하도록 만들어준 것 같다"고 말했다.

김용준/김현예 기자 junyk@hankyung.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