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직도 업계 사람들을 만나면 고무개스킷 만드는 회사의 사장이 여자라는 사실에 다들 놀라고 가끔은 무시도 당하지요. 하지만 나만한 기술자도 없다는 사실을 알고 난 뒤엔 더 크게 놀라더군요. "

판형열교환기개스킷 전문회사 바이저의 송미란 대표(46)는 "국내 최고의 판형열교환기개스킷 업체를 넘어 세계 최고의 회사로 키우겠다"며 이렇게 말했다.

판형열교환기개스킷은 열교환기(냉 · 온수 등의 액체를 통과시켜 열을 전달,배출하는 기기)의 얇은 철판 사이사이에 부착되는 고무부품.액체가 이동하는 경로를 만드는 것은 물론 액체 유출을 막는 역할을 맡는다. 발전소 · 선박용 열교환기의 핵심 부품이다.

바이저는 설립(2004년) 5년 만에 이전까지 국내에서 전량 수입해서 쓰던 판형열교환기개스킷의 60%를 수입 대체할 정도로 업계 최강의 회사다. 회사의 제품은 STX조선,삼성중공업 등에 공급되는 판형열교환기에 100% 부착된다. 지난해 56억원의 매출을 올렸고 올해는 약 90억원을 예상한다.

딸 둘을 키우며 평범한 가정주부로 살던 그가 열교환기와 인연을 맺게 된 것은 1991년.열교환기부품 전문회사의 대표였던 남편에게 힘을 보태자는 심정으로 회사일을 돕기 시작했다. 송 대표는 "원래 집에만 있는 성격이 못 돼 늘 뭔가를 하고 싶던 차였다"고 말했다.

직원 10명 미만의 작은 회사에서 10년 가까이 일주일에 2~3일씩 밤을 새워가며 남편과 사업을 꾸려가다 보니 이것저것 배운 것이 많았다. 일에 재미를 느껴 퇴근한 뒤에도 집에서 부기책을 놓고 공부하는 것은 물론 열교환기 설계까지 독학할 정도였다. 그는 "초 · 중학교 시절 육상선수를 해 체력에는 자신있었다"며 "몇 년간 꾸준히 공부하고 공장에서 만드는 것도 돕다 보니 '나도 할 수 있겠다'는 생각이 들었다"고 말했다.

그러던 2001년 송 대표는 남편과 함께 판형열교환기 완제품을 생산하는 회사인 LHE를 세우며 사업 확장에 나선다. 회사 제품의 품질이 좋고 가격도 싸다는 소문이 나면서 매년 매출이 두 배씩 늘 정도로 장사는 잘됐지만 곧 고민거리가 생겼다. 항상 액체가 새고 고무가 눌어붙는 일이 다반사일 정도로 수입 개스킷의 품질이 좋지 않아 늘 애프터서비스(A/S)를 해줘야 했던 것.

이에 송 대표는 개스킷의 자체 개발에 나섰다. 고무 배합부터 시작해 3년간 '맨땅에 헤딩'하듯 연구에 매달린 결과 국산화에 성공했다. A/S 건수가 수입산의 10분의 1로 줄어들 정도의 좋은 품질을 유지한 데다 고무를 성형할 때 길이 5m짜리 제품에 조그만 기포 하나가 섞여 들어가지 않을 정도의 초정밀 가공기술까지 확보하게 됐다.

송 대표는 이를 바탕으로 2004년 LHE를 떠나 바이저를 세웠다. 혼자 힘으로 개스킷을 만드는 사업을 해보고 싶었던 것.그는 "남편은 내가 개스킷에 관심이 있다는 것을 알았고 좋은 개스킷을 납품해 줄 회사도 필요했기 때문에 오히려 내 독립을 격려했다"고 설명했다.

그렇지만 홀로서기는 쉽지 않았다. 여직원 한 명을 데리고 시작해 생산,납품 등을 혼자 도맡아야 했다. 송 대표는 "한여름에도 공장에 선풍기를 못 돌릴 정도였고 3개월씩 직원들 급여를 주지 못할 때도 있었지만 여자 사장이 손에 기름때 묻혀가며 기계를 만지는 것을 보고 아무도 불평하지 않고 잘 따라줬다"며 "물건을 써본 열교환기 업계에서 품질이 월등히 좋다는 소문이 돌면서 설립 3년 만에 국내시장에서 1위를 차지할 수 있었다"고 설명했다.

송 대표는 2007년에는 원료가 되는 고무의 품질을 높이기 위해 연구소를 세웠고,최근에는 생산성을 세 배 이상 높일 수 있는 신형 생산기기도 개발하고 있다. 송 대표는 전 직원 33명에게 매년 한 차례씩 보약을 지어먹일 정도로 직원들을 챙긴다. 언니,누나이자 어머니 같은 사장이 되고 싶다는 생각에서다.

송 대표는 화상환자 돕기에도 관심이 많다. 그는 약 50억원의 사재를 털어 올해 말 설립을 목표로 화상환자를 돕기 위한 재단을 만들고 있다. 화상환자들의 재활과 성형수술을 지원하는 곳으로 만들겠다는 것이 송 대표의 생각.

그는 "어느 날 우연히 TV에서 화상환자들의 생활상을 보고 그들이 한정된 의료지원을 받고 있음을 알게 된 뒤 내가 한번 환자들의 재활에 나서보고 싶다는 생각이 들어 4년 전부터 본격적으로 준비를 해왔다"며 "국내 최고의 개스킷 업체로 키워나가는 것은 물론 화상환자 돕기사업도 성공적으로 해내겠다"고 밝혔다.

김해(경남)=임기훈 기자 shagger@hankyung.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