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석호필 신드롬'을 불러일으켰던 미드(미국 드라마) '프리즌 브레이크(Prison Break)'와 최근 인기를 끌고 있는 드라마 '결혼 못하는 남자'의 공통점은? 둘 다 주인공이 건축사라는 점이다. '결혼 못하는 남자'의 조재희는 쉬는 날 프라모델(플라스틱 모델 · 조립식 장난감)을 조립하고,'프리즌 브레이크'의 마이클 스코필드는 온 몸에 감옥의 설계도를 문신으로 새겨 탈옥에 성공한다. 하지만 30년 경력의 베테랑 건축사인 오섬훈씨(50 · 어반엑스 대표)의 서울 원서동 사무실을 들어서는 순간 이런 환상은 여지없이 깨졌다. 도면과 갖가지 건물 모형으로 어질러진 사무실에서 직원들은 바삐 움직이고 있었고,그 한가운데서 오 대표는 뭔가를 열심히 지시하고 있었다.

그는 '결혼 못하는 남자'의 조재희처럼 쉬는 날 프라모델 장난감을 가지고 노는 건축사는 거의 없다고 말했다. 또 '프리즌 브레이크'의 마이클 스코필드처럼 온 몸에 감옥의 설계도를 새겨 탈옥한 건축사도 '아직은' 없다고 덧붙였다. 다만 "스코필드가 드라마에서 보여준 것처럼 사물을 종합적으로 보는 능력과 빈틈 없는 준비성,여러 사람들과 함께 탈옥을 도모하는 협동심은 건축사에게 필요한 속성 중 하나"라고 설명했다.

우리가 알고 있는 건축사의 모습과 실제 그들의 삶은 어떻게 다를까. 1980년 서울대 건축학과를 졸업하고 20년 넘게 유명 종합건축설계업체 '공간'에서 일하다 3년 전 개인 회사를 차린 오 대표에게 물어봤다.

▼건축은 산업인 동시에 예술의 한 영역인데 둘 사이에서 겪는 건축사들만의 고충이 있을 듯합니다.



"건축은 추상적인 개념을 실제 공간에 풀어내는 작업입니다. 대학교 3학년 때 초등학교 건물을 설계하는 프로젝트를 맡았던 적이 있는데 그때 자궁과 같은 공간을 만들고 싶었어요. 아이들이 신체적으로나 정신적으로나 급격히 성장하는 공간인 만큼 태아가 수정되어 사람의 모습을 갖추는 자궁과 비슷한 역할을 한다고 생각했습니다. 하지만 이렇게 생각을 하는 것과 그 아이디어를 구체적인 공간에 풀어내는 것은 별개의 문제입니다. 그때도 여러 선배들의 자문을 받았지만 결국 구체화하는 데는 한계가 있었죠."

▼추상적 개념을 구체적으로 풀어내기 위해 건축사에게 필요한 것은 무엇입니까.



"건축적 언어가 풍부해야 합니다. 건축에 쓰이는 소재와 기법을 많이 알고 있어야 자신의 생각을 건축물에 충분히 담아낼 수 있죠.예컨대 같은 모양의 건물이라도 표면을 유리로 하는가,콘크리트나 알루미늄으로 하는가에 따라 느낌이 전혀 달라요. 추상적인 아이디어를 단계적으로 발전시켜 건축적인 형태에 근접하도록 유도하는 데 필요한 것이 바로 공학 지식입니다. 그래서 건축가는 항상 디자인 트렌드와 함께 소재와 건축기법의 최근 동향까지 숙지하고 있어야 합니다. "


▼개인적으로 선호하는 건축적 언어는 어떤 것이 있나요.

"유리를 이용한 '커튼 월(curtain wall · 건물의 외벽을 규격화한 패널로 마감하는 것)'을 선호하는 편입니다. 다양한 응용이 가능한 데다 시간에 따라 여러 가지 모습을 보여줄 수 있다는 장점이 있죠.유리는 맑게 안이 비치는 유리,색깔이 들어간 유리,실크스크린으로 그림이나 글자를 넣은 유리 등 다양합니다. 반듯해 보이는 건물도 보는 각도에 따라 굴곡이 지도록 만들 수도 있어요. " (실제 그의 작품에서는 '커튼 월'을 자주 볼 수 있다. 인천 송도의 갯벌타워,서울 역삼동 삼정호텔,분당의 벤츠자동차 전시장 등이 그의 작품이다. )


▼커튼 월의 에너지 효율이 낮다는 지적을 받고 있는데요.

"맞습니다. 커튼 월로 건물 전체를 두르면 에너지 효율에 심각한 문제가 생겨요. 따라서 흔히 '라이프 사이클 코스트(Life-cycle Cost)'라고 하는,건물이 지어져 있을 동안인 20~30년간의 유지비용까지 감안해 설계를 합니다. 초기 비용이 좀 들어가더라도 에너지 절약을 위한 작업을 많이 하죠.커튼 월의 경우 건물 전체에 적용하기보다는 한쪽 면이나 일부에만 적용해 효과를 주도록 하고 있습니다. "

▼기억에 남는 작업은 어떤 게 있습니까.

"경남 통영의 수산과학관이 기억에 남아요. 입찰 과정에서도 2등과 한두 표 차이였는데 당선 이후 작품을 설명하는 과정에서 여러 분들에게 질책을 받았어요. 수산과학관인데 왜 배 모양이 아니냐,해안에 만드는 것인데 바람이 세게 불면 날아가는 것 아니냐는 등 비판이 많았죠.결국 일부 비판을 수용해 수정안 모형을 다시 만들어 들고 서울에서 사천비행장까지 날아가 택시로 통영으로 이동했는데 참 힘들었어요. "

▼땅 위의 공간에 들어설 건축물을 실내에서 설계하기가 어려울 것 같습니다.

"그렇습니다. 설계로서의 건축은 도면으로 끝나지만 건축사들은 건축물이 지어진 후에야 작업이 끝난다고 생각합니다. 그렇게 지은 건축물이 10년,20년 지나서야 진가를 발휘하기도 합니다. 미국건축가협회에서 '25년상'을 제정해 준공 25년이 지난 건축물만 따로 모아 시상하는 것도 비슷한 맥락이죠.따라서 현장을 답사해 주변 환경을 살피는 게 중요합니다. 조감도와 설계도에서는 건축물의 안만 보이지만 정작 건축물을 이용하는 사람들이 보는 것은 바깥이니까요. "


▼창작활동이라 영감과 아이디어가 중요하겠군요.

"일단은 작업에 몰입하는 게 우선입니다. 그래도 안 되면 작업에 의식적으로 거리를 두려고 하죠.회사 인근의 북촌마을 등을 산책하면서 한발자국 뒤로 물러나 있는 시간을 꼭 가집니다. 영감도 일단 노력이 전제돼야 하겠지만 바둑도 훈수 두는 사람에게 더 잘 보이듯,조금 거리를 두고 보는 각도를 달리하면 새로운 아이디어가 나오기도 하거든요. 퇴근길 차안에서 다른 생각이 떠올라 직원들에게 수정을 지시한 경우도 많고,꿈에서 본 걸 스케치해 놓은 경우도 있죠."


▼창작하는 사람들로 이뤄진 조직이라 여느 조직과는 다를 것 같은데요.

"일단 업무와 관련한 주요 대화가 스케치와 모형을 중심으로 이뤄진다는 점이 일반 조직과 달라요. 말로 설명하는 것보다 눈으로 보여주는 게 빠르니까요. 구성원들이 회사 직원이기 이전에 독립적인 건축가들이므로 대강의 밑그림은 공유하더라도 그 위에 무엇을 채울지는 각자가 결정합니다. 그러나 항상 그 안이 마음에 든다는 보장이 없는 만큼 회사 대표인 저도 나름의 안을 만들어놓고 대화해야 해요. 직원의 성과를 평가하기도 쉽지 않습니다. 1980년대까지만 해도 '거장의 시대'라고 해서 건축적인 기준이 확립돼 있었는데 지금은 정말 시각이 다양해졌어요. 대표인 제 아이디어가 다른 직원들 것보다 낫다고 말할 수도 없어요. "


▼앞으로 어떤 작품을 하고 싶습니까.

"소규모라도 기존 아파트와는 다른 색깔의 공동주택을 설계하는 게 올 하반기 목표예요. 사실 많은 사람들이 아파트에 살지만 아파트를 고향으로 느끼는 사람들은 많지 않습니다. 저는 개별 동만이라도 다르게 지어서 살던 사람이 잠깐 다른 곳에 가 있으면 그립고 돌아오고 싶은 느낌이 드는 아파트를 만들고 싶어요. "

글=노경목/사진=김영우 기자 autonomy@hankyung.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