노무현 전 대통령의 자살과 관련해 검찰 책임론이 일부에서 제기되고 있다. 검찰로서는 억울한 일이지만,법조계 일각에서는 검찰이 수사 과정에서 일관되고 합법적인 원칙을 견지하고,전직 대통령에 대한 예우에 조금만 신경썼다면 노 전 대통령이 자살까지 선택하지는 않았을 것이란 지적이 나오고 있다.


1. 신병처리 좀 더 빨랐다면

검찰은 노 전 대통령에 대한 신병처리를 지연하면서 심리적 압박을 고조시켰다. 검찰은 당초 지난달 30일 노 전 대통령을 소환조사한 후 이달 초 그에 대한 구속 또는 불구속 기소 여부를 결정할 방침이었다. 검찰은 그러나 "100만달러의 용처와 관련해 추가 조사할 필요가 있다"며 신병처리를 20일가량 미뤘다. 이는 검찰이 지난달 권양숙 여사를 소환할 당시 "받은 돈의 용처를 규명할 필요는 없다"고 밝힌 입장과 상반된 것이었다. 이 과정에서 40만달러 추가 수수 의혹 등이 밝혀지면서 노 전 대통령은 소환조사 이후 20여일 동안 자존심에 큰 상처를 입어야 했다. 40만달러를 포함한 100만달러의 용처에 대한 말바꾸기와 딸 정연씨의 미국 집 계약,억대 명품시계 폐기 사실 등이 알려져 '거짓말''증거 인멸' 등 비난에 시달려야 했다. 한 대형 로펌 변호사는 "피의자에 대한 압박은 수사를 위해 불가피하지만,미리 모든 증거를 확보해 소환조사에서 '빼도박도' 못 하도록 하는 방식이었다면 상황이 달라졌을지도 모른다"고 말했다.



2. 재소환 언급 안했다면

노 전 대통령이 부엉이바위에서 뛰어내린 지난 23일은 다름아닌 권양숙 여사의 재소환이 예정됐던 날이다. 배우자가 검찰에 불려나가는 고통을 받는 데 대한 노 전 대통령의 심리적 부담이 컸을 것으로 예상되는 대목이다. 검찰은 또 40만달러 수수와 관련해 노 전 대통령을 재소환할 가능성도 내비쳤다. 또다시 검찰 포토라인에 서는 구차한 모습을 보여야 할지도 모르는 상황이었다.

노 전 대통령 부부에 대한 재소환 계획은 모두 검찰의 당초 입장과 다른 것이었다. 검찰은 전직 대통령에 대한 예우를 들며 소환조사 전 "재소환은 고려하지 않는다"고 밝혔고,권 여사에 대해서도 100만달러 용처 조사의 불필요성을 들며 재소환 계획이 없다고 발표했다. 검찰이 당초 입장을 바꿔 신병처리에 시간을 끌고 재소환 계획까지 직간접적으로 언급하면서 노 전 대통령이 '고통의 끝'을 알 수 없는 절망감에 휩싸였을 것이라는 게 법조인들의 분석이다.


3. '빨대' 없었다면

법조계에서는 검찰이 '빨대'(언론에 수사 기밀을 흘리는 내부 취재원을 뜻하는 은어)를 통해 노 전 대통령의 피의사실을 수사 과정 내내 흘린 것은 단순한 '망신주기'를 넘어 '불법 행위'라고 지적하고 있다. 지난달 22일 "박연차 전 태광실업 회장이 노 전 대통령에게 2006년 회갑 선물로 억대 명품 시계를 건넸다"는 한 TV 뉴스는 대표적 사례.문재인 변호사(전 청와대 비서실장)가 "검찰이 노 전 대통령에게 망신을 줄 목적으로 이런 내용을 흘렸다면 나쁜 행위,나쁜 검찰"이라고 강하게 비난한 것으로 비춰볼 때,노 전 대통령이 당시 치명적인 마음의 상처를 입은 것으로 보인다. 검찰 측은 "빨대를 색출하겠다"고 한발 물러섰지만 '빨대'를 통한 피의사실 유포는 계속됐다. 유시민 전 보건복지부 장관은 최근 자신의 블로그에 올린 글에서 "전쟁포로라 할지라도 적장에 대해 이토록 졸렬한 방법으로 모욕을 줘선 안 된다"고 비난했다.


4. 박연차 대면 안했다면

노 전 대통령 소환조사 당시 검찰은 그와 박연차 전 태광실업 회장과의 대질조사를 시도했다. 이는 사전에 합의되지 않은 사항이었다. 시간도 오후 11시로 매우 늦었다. 노 전 대통령 측은 이에 대해 "전직 대통령에 대한 예우가 아니고 시간이 너무 늦었다. 밤샘조사를 하겠다는 것이냐"며 큰 불쾌감을 표시하며 거부했다. 노 전 대통령은 결국 초췌한 모습의 박 전 회장을 대면해 인사만 나누고 대질조사는 하지 않았다.

노 전 대통령은 이로 인해 불쾌감과 함께 박 전 회장에 대한 미안한 마음도 극대화됐을 것으로 보인다. "나로 말미암아 여러사람이 받은 고통이 너무 크다"는 유서 내용에는 박 전 회장에 대한 이 같은 심정이 반영된 것으로 추측된다.

임도원 기자 van7691@hankyung.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