침묵.진술번복시 수사.재판에 큰 차질

노무현 전 대통령의 갑작스런 서거로 대검찰청 중앙수사부의 `박연차 게이트' 수사는 물론 그동안 줄줄이 기소됐거나 기소가 예정된 인사들의 재판 향방에도 돌출 변수가 생겼다.

지금껏 검찰 수사에서 박연차 전 태광실업 회장의 진술이 강력한 증거가 돼 왔지만, 노 전 대통령의 서거로 박 전 회장이 상당한 심리적 충격을 받아 향후 수사와 재판에서 돌연 입을 닫아버릴 개연성이 있기 때문이다.

박 전 회장은 세종증권 인수 비리로 지난해 12월 구속기소된 이후 대검 중수부의 `박연차 게이트' 수사를 떠받치는 주요 축이 돼 왔다.

이에 따라 그가 금품 공여 혐의의 피의자이거나 증인으로 돼 있는 재판만 해도 정상문 전 청와대 비서관과 노 전 대통령의 형 건평씨, 정대근 전 농협회장, 정화삼.정광용 씨 형제, 송은복 전 김해시장, 추부길 전 청와대 홍보기획비서관, 박정규 전 민정수석, 이광재 민주당 의원, 이정욱 전 해양수산개발원장 등 줄잡아 10여건에 이른다.

또 그동안 검찰 조사를 받은 천신일 세중나모여행 회장을 비롯해 박관용·김원기 전 국회의장, 박진·서갑원 의원, 이택순 전 경찰청장 등 정치인과 검찰·경찰 간부, 그리고 앞으로 소환될 정치인과 지방자치단체장 및 법원 간부까지 더하면 20명에 가까운 인사들이 더 재판에 넘겨질 예정이다.

이들 모든 재판에 박 전 회장이 나서야 하기 때문에 검찰은 그의 건강과 함께 정확한 기억력을 기대해야 하는 형편이다.

박 전 회장은 먼저 나서서 누구에게 돈을 줬다고 말하지는 않지만 검찰이 정황 증거를 수집해 들이밀 때는 비교적 상세하게 돈을 건넨 시점과 액수 등을 진술해왔다는 게 검찰의 설명이다.

상대방이 부인해 대질 조사가 이뤄질 때도 돈을 전달한 당시 상황을 구체적으로 기억해내 `박 검사'라는 별칭마저 얻기도 했다.

박 전 회장은 한 번 입 밖으로 낸 말은 번복하지 않는 것으로 알려졌으며, 검찰도 박 전 회장의 진술에 꽤 신빙성이 있음을 여러 차례 강조해왔다.

그러나 노 전 대통령이 신병처리를 앞두고 투신을 선택함에 따라 박 전 회장이 심적 충격의 여파로 심경 변화를 일으켜 입에 자물쇠를 채울 가능성도 없지 않다.

바로 이 점이 수사와 공소유지를 겸하는 수사팀을 긴장하게 만들고 있다.

실제로 구치소에 수감돼 있는 박 전 회장은 노 전 대통령의 소식을 듣고 식사를 제대로 하지 못할 정도로 충격을 받은 것으로 알려졌다.

박 전 회장으로서는 20년간 후원해온 노 전 대통령이 자신의 진술을 바탕으로 검찰에 소환됐을 때 직접 특별조사실에서 어색하게 해후하기도 했던 터였다.

박 전 회장은 이번 수사로 자신이 돈을 건넨 인사들이 줄줄이 구속되거나 검찰에 소환되자 검찰 조사를 받으며 괴로운 심경을 털어놓기도 했었다.

만일 박 전 회장이 노 전 대통령의 서거로 입을 닫게 되면 검찰로서는 남아있는 수사는 물론 기소한 인사들의 재판에서도 큰 어려움을 겪을 수밖에 없는 형편이다.

그동안 박 전 회장의 `자백'이 불법 정치자금이나 뇌물을 받았다는 이들의 혐의를 입증하는 데 결정적 구실을 해왔기 때문이다.

뇌물 등 불법 자금 사건에서는 대부분 목격자 등 제3자 없이 돈이 현금으로 전달되는 경우가 많아서 당사자 진술의 신빙성이 주요 증거가 되는데, 박 전 회장이 진술을 번복하거나 입을 닫아 버리게 되면 자칫 무죄 판결이 줄을 이을 가능성도 없지 않다.

검찰은 박 전 회장 진술 외에도 각종 직·간접적인 증거를 상당 부분 확보했다고 자신하고 있지만 박 전 회장이 법정에서 돈 준 사실은 인정하더라도 청탁 목적이 아니었다거나 대가성이 없었다고 증언하면 유·무죄 또는 형량에 큰 영향을 미칠 것으로 보인다.

검찰은 노 전 대통령에 대한 수사는 마치더라도 다른 정치인 및 공직자에 대한 수사와 기소는 계속한다는 입장이어서 박 전 회장의 심경 및 태도가 그간의 평상심을 유지할지 더욱 주목되는 시점이다.

(서울연합뉴스) 백나리 기자 nari@yna.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