진 시황제의 악정을 분서갱유(焚書坑儒)라고 통칭하지만, 분서는 통일 직후 정권 안정을 위한 정치 사건인데 반해 갱유는 불로장생이라는 황제 개인의 빗나간 욕망이 빚은 엉뚱한 분풀이 사건이었다.

"방술에 영험이 없자 사형당할 것을 두려워한 방사(方士)들이 황제의 부덕을 비난하며 도망치자 시황은 분노했다. '짐이 그들을 우대해 주며 선약(仙藥)을 구하게 하였으나, 어떤 놈은 한 번 가더니 소식이 없고 서불(徐市) 등은 돈만 낭비했다. 저네들끼리 이익을 다투고 고발하더니 급기야 짐을 비방하기에 이르렀다. ' 어사가 조사를 시작하자 서로가 서로를 고발한 방사가 460여명에 이르렀는데, 이들을 모두 함양에 생매장했다. " <사기 진시황본기>

약 90년 후 불로장생에 모든 것을 건 또 한 명의 황제가 있었다. 바로 한(漢)의 무제(武帝)이다. 위대한 황제라는 칭송에 걸맞지 않게 그의 치세 54년은 대부분 신선이 되고자 하는 열정으로 시종했다. 22살의 청년 황제에게 늙지 않고 영생하는 신선의 세계를 처음 열어보인 방사는 이소군(李少君)이었다.

"이소군은 천자의 방술과 의약을 주관했는데, 불로장생하여 항상 나이가 70살이라고 했다. 한번은 궁중에서 90살 노인의 소싯적 일을 맞히자 사람들은 그가 신선이며 나이는 수백살이나 됐을 것이라고 수군댔다… 얼마 후 병들어 죽었는데, 황제는 그가 신선이 되어 승천한 것이지 죽은 것은 아니라고 여겼다. " <사기 효무본기>

이후에도 황제는 소옹(少翁) 난대(欒大) 같은 방사들을 애지중지했다가 결국 그들에게 속고 분노한 나머지 처형해 버리기를 되풀이했다. <사기> 본기나 봉선서의 무제 관련 기록들이 방사들과의 애증으로 점철된 것은 금상(今上)의 어리석음을 에둘러 고발하려는 사마천의 의도도 한몫했다.

이처럼 중국에서 죽음의 문제가 즉물적이고 형이하학의 범주에 머물고 만 데는 '어떻게 살 것인가가 중요하지 죽은 뒤는 얘기할 게 못된다(未知生, 焉知死)'고 한 공자의 현세적 태도가 영향을 미쳤다. 그래서 유가는 생사는 천명이지만, 도덕적 조건에 따라 요수(夭壽)가 결정될 수도 있다고 가르칠 뿐이다. 반면 죽음의 문제를 가장 적극적으로 다루고 있는 것은 <장자(莊子)>이다.

"생은 때를 얻은 것이요, 죽음은 자연의 변화에 따르는 것이다. 이를 그대로 받아들이면 슬픔과 즐거움이 끼어들 틈이 없다. (得者時也, 失者順也, 安時而順, 哀樂不能入也.)"

"대지는 나에게 몸을 주고, 삶을 주어 힘쓰게 하고, 늙음으로 편하게 하고, 죽음으로 쉬게 한다. (夫大塊載我以形, 勞我以生, 佚我以老, 息我以死.) "<대종사(大宗師)>

장자의 자연주의적 생사관은 20세기 초 루쉰(魯迅)에게 계승됐다. 루쉰은 종족의 지속이라는 진화론의 관점에서 생사의 문제를 다룬 몇 편의 글을 썼는데, <생명의 길(生命的路)>이란 짧은 산문에서 이런 에피소드를 쓰고 있다.

"길은 옛날에도 있었고, 앞으로도 영원히 있다. 인류는 영원히 쓸쓸하지 않을 것이다. 생명은 진보하고, 낙천적이기 때문이다. 어제 나는 내 친구 L에게 이렇게 얘기했다. '한 사람이 죽는 것은 그 자신과 가족들에게는 슬픈 일이다. 하지만 마을이나 고을로 보면 큰 일이 아니다. 더더욱 한 성(省), 한 나라 입장에서 보자면…' L은 기분 나빠하며 말했다. '그것은 Nature(自然)의 말이지, 사람의 말은 아니네. 자네 조심해야겠네.'<이욱연 역>

대법원이 마침내 우리 사회에 존엄사를 허용하는 판결을 내렸다. 이번에는 식물환자에 대한 무의미한 생명 연장이 논란거리였지만, 고령화사회로 갈수록 스스로 인간답고 행복하게 죽을 수 있는 권리를 둘러싼 적극적 존엄사가 문제가 될 것이다. 철학의 소임 중 하나는 죽음을 이해하고 제대로 받아들이는 데 있고, 어떻게 죽을 것인가 하는 문제는 곧 어떻게 살 것인가 하는 문제와 연결돼있다. 이번 판결이 고령화사회와 죽음의 문제를 생각해보는 계기가 됐으면 좋겠다.

편집위원 umbeco@hankyung.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