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동양인 바로크음악 개척자 역할에 사명감"

"콧대 높은 유럽 바로크 성악계에서 활동하는 거의 유일한 동양 여성이라는 사실에 큰 사명감을 느낍니다.앞으로 이 분야로 진출할 동양 성악가들의 미래가 제 어깨에 달린 셈이니 제가 더 잘 해야겠지요."

10년째 유럽 무대를 종횡하는 임선혜(33)는 한국 소프라노로는 드물게 하이든ㆍ모차르트ㆍ바흐ㆍ헨델ㆍ비발디 등 바로크 고전 레퍼토리에서 주가를 올리는 젊은 성악가.

풍부한 감성과 영리한 해석력, 당찬 연기력을 앞세워 음악 전통이 깊은 유럽의 '자존심'으로 통하는 바로크음악계의 정상에 섰다는 점에서 특별한 존재다.

1999년 벨기에 출신 거장 지휘자 필립 헤레베헤의 눈에 띄어 유럽 무대에 데뷔한 후 동양 여성에 대한 편견을 보기 좋게 깨뜨리며 유럽 성악계를 거침없이 누비는 그를 20일 명동에서 만났다.

오는 26일 명동성당에서 열리는 희망나눔 음악회를 앞두고 전날 독일 베를린에서 귀국한 그는 "독일 칼스루 국립음대에 재학 중이던 1999년 12월 헤레베헤에게 발탁됐으니 꼭 10년이 지났다"면서 "그동안 어려움도 많았지만 바로크음악계에서 어느 정도 입지를 다진 것 같아 스스로도 대견하다"고 말문을 열었다.

"10년 전 매니저를 통해 헤레베헤로부터 받은 전화 한 통이 제 인생을 바꿔놓았죠. 당시 벨기에 브뤼셀에서 그의 지휘로 열릴 예정이던 'C단조 미사' 등 모차르트 공연을 하루 앞두고 소프라노 한 명이 갑자기 무대에 서지 못하게 된 거에요.

'이 곡을 해본 적이 있느냐'는 물음에 무조건 '있다'고 거짓말을 하고, 밤새 연습한 뒤 다음날 새벽 7시간 동안 기차를 타고 브뤼셀로 갔어요.

"
임선혜의 노래를 들은 헤레베헤의 반응은 뜨거웠다.

눈을 동그랗게 뜬 그는 이런 성악가를 어디서 찾아냈냐고 흥분하며 "'금빛' 음악성을 가졌다"는 찬사를 쏟아냈다.

"제 나이가 그때 만 23살이었어요.

어린 나이에 성숙한 음악성을 가졌고, 다른 문화권에서 온 성악가가 서양의 노래로 청중을 감동시킬 수 있는 게 놀랍다고 말하더군요."

이렇게 우연한 기회에 고음악계에 발을 들여놓게 된 임씨는 이후 르네 야콥스ㆍ윌리엄 크리스티ㆍ파비오 피온디 등과 작업하면서 '아시아의 종달새'라는 별명을 얻었다.

특히 야콥스와 함께 한 모차르트 오페라 시리즈는 그가 바로크음악계 최고의 프리마돈나로 입지를 확고히 다지는 발판이 됐다.

2006년 발표한 '티토황제의 자비'는 그래미상 클래식 부문 '올해의 앨범' 후보에 오를 만큼 큰 호평을 받았고, '돈조반니'에서는 발랄한 체를리나 역으로 깊은 인상을 남겼으며, 이번 주말 유럽에서 출시할 '이도메네오' 역시 출반이 되기 전에 이미 프랑스의 유력 음반상 2개를 받을 정도로 반응이 좋다.

정상으로 뻗은 길을 순탄하게 걸어온 듯한 그에게도 시련은 있었다.

"동양인은 연기를 잘 하지 못한다는 편견 때문에 오디션도 보기 전에 (배역에서) 떨어진 적이 두 번이나 있었지요.그때 이를 악물은 덕분에 지금은 비련의 여주인공부터 통통 튀는 여주인공까지 폭넓은 배역을 소화할 수 있는 것 같아요."

그는 바로크 음악이 아직 국내 음악가에게는 생소하지만 앞으로 점점 더 가능성이 높은 '블루오션'이 될 것이라고 내다봤다.

"지금은 바로크음악계에서 활동하는 동양인은 거의 제가 유일할 거에요.하지만 한국 성악가들이 워낙 음악성이 좋은 만큼 이 분야에 도전한다면 금방 깨우칠 수 있을 겁니다.자기 목소리가 푸치니 작품과 잘 맞지 않는데 주류 오페라를 고집할 필요가 있겠어요? 과감하게 바로크음악으로 방향을 돌려보세요."

그는 "일반적인 음악은 귀를 자극하기 위해 점점 음조(pitch)를 높여가는 추세지만 바로크 음악은 기준음보다 반음쯤 낮은 저음으로 풀어내는 음악"이라면서 "편안하고, 깊이 있는 음악을 추구하는 관객들에게도 잘 맞을 것"이라고 설명했다.

그동안 국내 무대에서 좀처럼 모습을 볼 수 없었던 그는 벌써 2014년 계획까지 잡힐 만큼 빡빡한 일정에서도 앞으로 고국 관객 앞에 자주 서고 싶다는 소망도 내비쳤다.

"처음에는 외국에서 활발히 활동하면 한국에서도 자연스레 알려지겠지 하는 마음이 컸어요.하지만 현실은 별로 그렇지가 않더라고요.보다 적극적으로 국내 관객과 만나야 할 것 같아요.기회가 닿는다면 오페라든 독창회든 자주 할 생각입니다."

26일 명동성당에서 열리는 희망나눔 음악회는 축성 111주년을 기념하는 '2009 명동대성당 문화축제'의 일환으로 임선혜는 이날 1시간에 걸쳐 '아베마리아' 등 친숙한 노래들을 선사한다.

"음악을 접할 기회가 적은 소외계층을 위한 음악회라 더 뜻깊어요. 사실 한국은 클래식을 즐기는 인구에 비해 연주자들이 훨씬 많은 이상한 구조거든요. 음악 저변을 넓힌다는 점에서도 의미가 큰 것 같고요."

"이곳저곳 떠돌며 공연하는 집시 같은 삶이지만 여러 사람과 어우러지며 다채로운 빛깔의 삶을 살 수 있어서 좋다"는 그는 "스스로의 만족을 위한 음악이 아닌 청중이 진정으로 즐기고, 좋아해 주는 음악을 하는 성악가가 되고 싶다"고 힘주어 말했다.

(서울연합뉴스) 현윤경 기자 ykhyun14@yna.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