중국 북송(北宋) 160년 역사는 연운십육주(燕雲十六州) 하나로 시종했다. 이 땅을 찾기 위한 전쟁으로 시작해서 이 땅을 탈환한 후유증으로 나라가 망하고 말았다. 연운십육주란 만리장성 이남,지금의 베이징(燕)과 다퉁(雲)을 포함한 16개 군사 거점을 일컫는다. 문제는 이 장성 안쪽의 땅을 새외(塞外) 민족인 거란 요(遼)가 지배하고 있다는 점이었다.

북송은 이 땅의 수복에 유달리 집착했지만 명분은 거창해도 거란의 군사력 앞에서는 공허한 구호일 뿐이었다. 태종은 두 차례나 거란 정벌을 시도했지만 실패로 끝났다.

후계자인 진종은 선제와는 달리 염전파(厭戰派)였다. 거란이 드디어 공세로 전환해 황하 유역까지 남하하자 당장 강남으로 피난 갈 궁리만 했다. 이런 황제를 억지로 친정(親征)에 내세운 다음 거란과 화평 조약을 맺게 한 것은 재상 구준(寇準)이었다. 협상의 핵심은 매년 거란에 줄 세폐(歲幣)의 규모였다.

"100만전(錢)까지는 아무래도 좋다(百萬以下皆可許也). "

진종은 특사 조이용을 보내면서 이렇게 지시했다. 그러나 구준은 떠나는 조이용을 불러놓고 말했다.

"비록 폐하의 뜻은 그러하나,30만전을 넘어서는 안 된다. 이를 넘기면 내가 너를 참수할 것이다. "

과연 세폐는 은 10만냥, 비단 20만필로 하고 진종이 거란 성종의 모후를 숙모로 받들어 양측이 형제 관계를 맺는다는 '전연의 맹약'을 체결했다(1004년).연운십육주는 현상 유지한다는 조항도 명기했다.

특사가 돌아와 진종에게 협상 결과를 복명할 때의 재미있는 에피소드가 전해진다.

조이용은 황제의 시종장인 환관에게 손가락 3개를 넌지시 펴 보였다. 그러자 시종장은 300만이란 뜻으로 알아듣고 황제에게 그대로 보고했다. 좀 있자 황제가 경악하는 소리가 방 밖에 엎드린 조이용에게까지 들렸다. 조는 그저 땀을 뻘뻘 흘리며 '소인을 죽여 주십시오'라고 할 뿐이었다.

황제 : 다시 말해 보라.도대체 얼마라는 말인가?

특사 : 30만전이옵니다.

순간 황제의 표정이 환하게 바뀌었다. 그 정도면 예상 밖의 대성과였던 것이다.

이 세폐 부담을 놓고는 해석이 첨예하게 엇갈린다. 중화주의 명분론은 오랑캐인 요를 승인하고 물자까지 줌으로써 결국 북송의 멸망을 초래했다고 비난한다. 그러나 실리를 따지자면 세폐 부담은 당시 대(對)거란 군비에 비하면 작은 규모였고,이것으로 거란의 돌발 행동을 120년 동안이나 잠재웠으니 오히려 득이었다. 화평이 성립하지 않았다면 북송은 벌써 그때 망했을 것이라는 진단도 있다.

일단 평화가 담보되자 건망증 심한 소인배들이 준동했다. 불과 몇 달 전 강남 파천을 주장했던 왕흠약 등은 항복 협상(城下之盟)이라고 비난했다. 굴욕을 씻고 실추된 황제의 권위를 선양한다며 국가적인 이벤트가 마련됐다. 천신(天神)이 진종을 격려했다는 편지가 날조되고,이에 감사하는 황제의 봉선 의식이 성대하게 치러졌다. 이런 와중에 협상을 이끈 구준은 황제로 하여금 '도박판에서 모든 것을 한꺼번에 걸도록(孤注一擲)' 한 죄로 좌천됐다.

북한의 개성공단 한밤 통보 이후 아연 대북 관계가 활기를 띠는 역설적인 현상이 나타나고 있다. '지켜보겠다는 것이 일관된 입장'이라던 정부가 먼저 대화를 제의한다고 한다. 대남 통보문을 놓고 추측이 난무하는데,우려되는 것은 북한의 의도를 무조건 돈 문제로 몰아넣고 보는 일부의 시각이다.

인민이 굶주리는 북한 입장에서 한푼의 달러화를 더 받는 것은 물론 중요할 것이다. 그러나 오히려 그럴수록 우리가 한 손에 지갑을 들고 그들을 길들이려는 모습으로 비쳐지는 것은 삼가야 하지 않을까. 약자의 자존심은 목숨보다 더 소중한 법이다. 역지사지(易地思之)까지는 어렵더라도 최소한 그들의 체면을 세워 주면서 실리를 얻는 지혜를 발휘했으면 좋겠다.

우종근 편집위원 rgbacon@hankyung.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