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기업 연구 · 개발 분야에서 일하는 김모 과장.그가 회사에 출근하는 시간은 오전 11시다. 복장은 편한 셔츠와 면바지.겉으로만 보면 일하러 온 것인지,놀러 온 것인지 알 수 없다. 뿐만 아니다. 매달 한 번씩은 '금-토-일'로 이어지는 3일간의 휴가를 즐긴다. 여름과 겨울 휴가도 2주씩 간다.

외국이나 먼 미래의 모습이 아니다. 삼성전자 직원 상당수가 올해부터 경험할 직장생활이다. 삼성전자는 '넥타이'와 '새벽 밥''긴 야근'을 차례로 추방하고 있다. 지난해 말에는 그룹 차원에서 복장 자율화를 선언했다. 최근엔 2주간의 휴가를 보장하는 장기휴가제도를 도입했다. 시범 운영 중인 자율출 · 퇴근제도 6월부터 24시간 교대근무를 해야 하는 일부 부서를 제외한 전 직원으로 확대한다. 무조건 열심히 일하는 '워크 하드(work hard)'가 아니라 똑똑하게 일하는 '워크 스마트(work smart)'가 기업 성장의 바탕이 될 것이라는 판단에서다.
[뉴스 인사이드] 장기휴가ㆍ자유 출퇴근‥쉬어야 아이디어 쑥쑥‥'워크 하드'에서 '워크 스마트'로
◆많이 놀고 똑똑하게 일하라

삼성그룹의 다른 계열사들도 비슷한 취지의 제도를 시행하고 있다. 제일기획은 2007년부터 '아이디어 휴가제'를 운영 중이다. 직원들은 연간 최대 2개월까지 휴가를 내고 자신이 원하는 지역을 방문해 경험을 쌓을 수 있다.

생명 카드 화재 등 금융계열사들도 최대 4주간 휴가를 쓸 수 있는 '자기계발 특별휴가제'를 도입했다. 징검다리 휴일 사이에 낀 평일에 연차를 쓰도록 권장하는 계열사도 늘어나는 추세다. 삼성화재는 연차를 쓰기 좋은 징검다리 휴일을 안내하는 달력까지 배포했다.

삼성전자에서 시범 운영 중인 자율출 · 퇴근제도 다른 계열사로 점차 확대될 전망이다. 삼성네트웍스는 이미 육아,통근 등 개인적인 애로 사항이 있거나 효과적인 업무 수행을 위해 근무시간 조정이 필요한 직원을 대상으로 '제한적 자율출 · 퇴근제'를 시행하고 있다.

◆여유에서 창의성이 나온다

삼성이 이 같은 변화를 꾀하는 것은 '관리'로 대변되는 기업 문화를 근본적으로 바꾸겠다는 목표에서다. 미래 '먹을거리'의 밑천은 창조적 아이디어라는 판단도 깔려 있다. 이를 위해선 직원들에게 눈앞의 업무 말고 다른 생각을 할 수 있는 '여유'를 줘야 한다는 게 삼성 관계자들의 설명이다.

삼성경제연구소 관계자는 "창의성이 강조되기 시작하면서 직원들의 여유시간에 대한 생각이 바뀌었다"며 "평일 야근,주말 특근,휴가 최소화 등을 통해 끌어올린 생산성보다 여유로운 시간에 찾아낸 뜻밖의 창의적인 결과물이 기업의 경쟁력에 더 많은 도움이 된다는 게 삼성을 비롯한 대부분 기업들의 공통된 생각"이라고 말했다.

젊은 인재의 이탈을 막기 위한 것도 한 목적이다. 삼성경제연구소의 보고서 '글로벌 인사 7대 트렌드'에 따르면 1978년 이후 태어난 '밀레니엄 세대'는 '베이비 붐 세대'(1945~1964년 출생자)나 'X세대'(1965~1977년 출생자)와 확실히 다르다. 이들은 승진이나 금전적 보상을 얻기 위해 개인의 삶을 희생하지 않으려는 경향을 보인다. 이들에게서 창의적인 결과물을 얻으려면 충분한 여가 시간을 보장해줘야 한다는 게 이 보고서의 결론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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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건비를 줄이는 효과는 덤이다. 삼성전자는 여름 · 겨울 2주 휴가제와 월 1회 '금-토-일' 연속휴무제도를 도입하면서 연차와 월차를 없앴다. 이에 따라 직원들이 연차와 월차를 반납할 때마다 지급해야 했던 수당 부담도 사라지게 됐다.

◆자율출 · 퇴근제가 업무효율도 높인다

이번 개혁의 핵심인 자율출 · 퇴근제에 대한 직장인들의 반응은 대체로 긍정적이다. 취업포털 사람인이 직장인 3450명을 대상으로 최근 '자율근무제와 업무효율'에 대한 설문조사를 실시한 결과 '업무효율이 높아질 것'이란 응답이 64.6%에 달했다. 자신의 신체와 정신 리듬에 맞춰 일할 수 있다는 이유에서다. '업무효율이 떨어질 것'이라는 응답은 34.6%에 불과했다.

자율출 · 퇴근제가 도입된다고 해도 직원들의 출근시간이 제각각이지는 않을 것으로 보인다. '출 · 퇴근 시간을 조절할 수 있다면 언제 출근하겠는가'라는 질문에 '지금처럼 오전 9시'라는 응답이 44.5%로 가장 많았다. 반면 '8시간을 채우는 선에서 수시로 근무시간을 조절하겠다'는 응답은 18.6%였다.

재계는 직원들에게 보다 많은 여유를 줘야 창의성을 높일 수 있다는 점에는 동의한다. 하지만 자율근무나 장기휴가의 효과는 섣불리 가늠하기 어렵다는 반응이다.

한 재계 관계자는 "수만명에 달하는 직원을 지금과는 다른 방식으로 관리해야 하는 만큼 오히려 더 많은 자원을 낭비할 수도 있다"고 말했다. 그는 "연 · 월차 휴가를 기업이 마음대로 없애면 노동법 위반"이라며 "일일이 직원들의 동의서를 받아야 하는 것도 번거로운 점"이라고 덧붙였다.

◆제3의 대안을 찾아라

삼성 이외의 다른 대기업은 대부분 기존의 인사관리 체계를 크게 흔들지 않는 범위에서 직원들의 창의성을 높일 수 있는 방안을 찾고 있다.

임직원들이 1주일에 5~10시간 정도 자신의 관심 분야를 마음껏 연구할 수 있게 한 SK텔레콤이 대표적이다. SK텔레콤은 지난해 7월부터 이 같은 내용의 '해피 트라이(happy try)' 제도를 시행하고 있다. 현업에 쫓겨 자신이 하고 싶은 일을 하지 못하는 직원들의 스트레스를 풀어주고 회사의 경쟁력을 높일 수 있는 창의적인 아이디어도 얻겠다는 의도에서다. 현재 22개팀,83명이 이 제도를 활용해 자신만의 연구시간을 갖고 있다.

LG전자는 사업부 단위로 1주일에 하루를 '가정의 날'로 정해 회사와 가정의 균형을 맞추고 있다. 이날만은 오후 6시 이전에 모든 업무를 마무리한다. 회사 관계자는 "자율출 · 퇴근제를 전면적으로 도입하기는 힘들지만 연차휴가만큼은 눈치 보지 말고 갈 것을 권장하고 있다"고 말했다.

송형석 기자 click@hankyung.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