신영철 대법관이 서울중앙지법원장 시절인 지난해 촛불재판에 개입했다는 의혹이 상당 부분 사실로 드러났다.

이번 파문은 촛불재판을 특정 판사에게 집중 배당했다는 소장 판사들의 내부 반발에서 비롯됐으나 국회 인사청문회 등에서 거짓 해명했다는 의혹에다 `압력성 이메일'까지 공개되면서 걷잡을 수 없이 커졌다.

16일 대법원 진상조사 결과에 따르면 시발점은 `몰아주기 배당'.
서울중앙지법원장이던 신 대법관과 당시 허만 형사수석부장은 작년 6월 19일부터 7월11일까지 8건의 초기 촛불집회 사건을 한 명의 부장판사에게 몰아줬다.

사회적 이목이 쏠린 중요 사건이어서 경력이 많은 판사가 맡는 게 낫겠다고 생각했다는 게 해명이었지만 다른 형사 단독 평판사들의 생각은 달랐다.

이들은 7월14일 모임을 갖고 시국사건을 몰아주는 배당에 문제가 있다는 결론을 내리고 형사수석부장과 신 대법관에게 이 의견을 전했다.

신 대법관은 다음날 `양형토론회'라는 이름으로 단독 판사들을 소집했고 이 자리에서 이후 접수되는 사건을 전산 프로그램에 의한 무작위 배당 방식으로 바꾸겠다고 약속했다.

법원 수뇌부와 소장 판사들 사이의 미묘한 갈등은 일단 봉합되는 듯했다.

신 대법관은 촛불사건을 골고루 배당하기 시작한 뒤인 작년 8월14일 압력으로 비칠 수 있는 이메일을 처음 보내면서 "보편적 결론을 도출하기 위해 노력해달라"고 적었다.

`튀는 판단'을 하지 말 것을 넌지시 주문하는 것으로 해석될 수 있는 대목이다.

그런데 당시 형사7단독 박재영 판사가 10월9일 야간집회를 금지하는 집시법 조항에 대한 위헌법률심판을 제청하며 피고인에게 보석을 허가하고 다른 일부 형사 단독 판사들도 헌법재판소의 판단을 지켜보자며 속속 재판을 연기했다.

촛불집회 관련자가 속속 보석으로 풀려나자 신 대법관은 10월13일 한 단독 판사에게 직접 전화를 걸어 "시국이 어수선할 수 있으니 보석을 신중히 결정하라"고 말했다.

신 대법관은 10월14일~11월24일 형사 단독 판사들에게 3차례 동시 이메일을 보내 "통상의 방법으로 재판을 진행하라"고 누차 당부했다.

헌재 판단을 기다리겠다는 판사들에게 현행법에 따라 유죄 선고를 내리라는 지시나 마찬가지로 해석될 수 있는 부분이다.

`대법원장 업무보고'라는 이메일에서는 "법원이 일사불란한 기관이 아니라는 것을 보여주기 위해서라도 나머지 사건은 통상적으로 진행하는 것이 바람직하다는 게 (대법원장의) 메시지였다"며 대법원장까지 끌어들여 판사들을 설득하려 했다.

아울러 신 대법관은 형사 단독 판사들과의 회식에서 미국 대법원의 예를 들면서 사법부가 흔들릴 수 있으니 가급적 촛불집회와 관련한 위헌법률심판제청을 하지 않는 게 좋겠다는 취지의 발언을 하기도 했다.

골고루 사건을 맡기기로 했던 약속도 지켜지지 않았다.

7월15일 이후 접수된 촛불집회 사건 96건 중 61건만 무작위로 배당되고 35건은 뚜렷한 이유 없이 일부 재판부가 배제된 채 배당됐다.

이와 관련, 진상조사단은 "사법행정권 남용 소지가 있다"고 판단했다.

올해 2월 정기 인사에서 당시 박재영 판사 등 3명이 한꺼번에 법복을 벗었다.

신 대법관이 `영전'해 서울중앙지법을 떠나고 형사 단독 판사들도 모두 자리를 옮기고 난 지난달 말부터 법원 내에서 돌던 이런 얘기가 언론 보도를 통해 외부로 알려지기 시작했다.

정치권 등으로 논란이 확산하자 대법원은 자체 조사에 나서겠다고 밝힌 지 하루 만인 지난달 26일 `부적절한 재판 간섭이 없었다'는 결론을 발표했다.

하지만 불만을 느낀 당시 단독 판사 일부가 지난 5일 신 대법관이 보낸 이메일 일부를 공개했고 사태의 심각성을 느낀 대법원은 바로 다음날 김용담 법원행정처장과 이태운 서울고등법원장 등으로 구성된 진상조사단을 가동했다.

조사결과가 나오기 전인 지난 8일 서울남부지법 김형연 판사가 법원 내부망에 글을 올려 신 대법관의 용퇴를 촉구하는 등 소장 판사를 중심으로 비판 여론이 가라앉지 않았다.

대법원은 10여 일 간의 조사 끝에 신 대법관이 "재판 내용 및 진행에 관여한 것으로 볼 소지가 있다"는 결론을 내렸다.

(서울연합뉴스) 차대운 기자 setuzi@yna.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