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구 200만 훌쩍..박정희는 추산 불가

16일 오후 선종한 김수환 추기경의 모습을 보기 위해서는 대단한 인내가 요구된다.

명동성동에 진입하기 위한 조문행렬은 통상 2~3㎞ 정도. 특이한 건 시간이 흐를수록 추모열기가 더 뜨거워지고 있다는 점이다.

19일 김수환 추기경 장례위원회에 따르면 조문 첫 날 1천500명으로 '단출하게' 시작된 조문객 수는 17일 9만6천500명, 18일에는 15만2천500여명으로 급증했다.

이 때문에 2-3시간은 기본이고 많게는 5시간을 기다리는 지난한 과정을 감수해야 김 추기경의 얼굴을 볼 수 있다.

다리에 쥐가나는 사람, 책을 읽는 사람, 음악을 듣는 사람 등 '기다리는 사람들'은 찬바람에 옷깃을 여미고 발을 동동거리면서도 10초라는 짧은 조문시간을 위해 그렇게 기다리는 것이다.

그렇다면 국민적으로 추앙받았던 다른 저명인사의 장례식에는 어느 정도의 인파가 몰렸을까.

조계종에 따르면 지난 1993년 열반한 성철 큰스님의 영결식(11월10일)에는 10만여명이 모인 것으로 추산된다.

조계종 관계자는 "장례 당일에만 10만여명이 참가한 점에 비춰 7일장으로 치러진 장례 기간에 수십 만명이 다녀갔을 것으로 보인다"고 말했다.

또 장례가 끝난 후 3주간에 걸쳐 진행된 사리친견법회 동안 40만명이 다녀갔다고 조계종은 밝혔다.

해방 이후 100만 이상의 많은 조문객이 다녀간 경우는 1949년 6월26일 안두희의 총탄에 순국한 김구의 장례식이 처음으로 알려졌다.

국사편찬위원회의 김득중 편사연구사에 따르면 26일 오후 12시30분께 서거한 후 28일 오후 1시까지 약 75만명이 종로구 평동의 빈소인 경교장을 다녀갔다.

김 연구사는 "장례가 10일장으로 치러진 만큼 조문객수는 200만명이 훨씬 넘었을 것"이라며 "영결식 당일에는 인근 상가가 영업을 중지했고, 경교장에서 서울운동장(동대문운동장)까지 인파가 가득찼다"고 말했다.

이후 유일하게 국장으로 치러진 박정희 대통령 영결식 당일(1979년.11월3일)에는 광화문 인근에만 200만명이 모였다.

전국 곳곳에 분향소가 마련됐고, 장례기간이 9일간 지속됐기 때문에 정확한 인원은 추산이 불가능하다고 김 연구사는 밝혔다.

또 박정희 대통령의 부인 육영수 여사 영결식(1974년 8월18일) 때는 빈소가 마련된 청와대에 10만명이 모였다.

육 여사의 장례는 국민장으로 치러졌고, 5일장이었다.

아울러 국민장으로 치러진 김성수 전 부통령의 장례식에도 전국 각지에서 100만여명의 인파가 몰린 것으로 알려졌다.

국민장은 '국장.국민장에 관한 법률'과 동법 시행령이 정하는 바에 따라 정부가 공식 주관하는 장례의식으로, 국장 다음으로 격이 높다.

정부가 이 법에 따라 공식 주관하는 장례는 국장과 국민장 두 종류뿐이며 장면 전 부통령, 신익희 전 국회의장, 조병옥 전 대통령 후보 등 12명이 국민장으로 장례가 치러진 바 있다.

(서울연합뉴스) 송광호 기자 buff27@yna.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