유사 이래 사람이 만든 게임 중에서 가장 역사가 깊고 오묘한 것은 역시 바둑이다. 서양의 체스나 중국의 장기는 물론 행마 방식이 훨씬 복잡한 일본의 장기까지 이미 컴퓨터가 인간과의 대결에서 승리한 지 오래다. 정보기술(IT)이 발달함에 따른 당연한 결과다. 그러나 바둑만은 컴퓨터가 인간의 영역을 아직 넘어서지 못하고 있다. 바둑 문화가 발달한 일본에서는 매년 컴퓨터 바둑대회가 열리는데,최고 수준의 컴퓨터 소프트웨어도 6~7급 수준의 기력에 머물고 있다. 그만큼 바둑의 수는 무궁무진하고,단순한 연산(演算)의 범위를 넘어서는 부분이 있다는 증거일 것이다.

필자가 바둑의 오묘함을 처음 접한 것은 초등학교 6학년 때였다. 당시 20여년간 우리나라 바둑계를 주름잡던 조남철 8단이 약관의 김인 5단에게 패해 국수(國手) 자리를 넘겨 주게 돼 화제가 되었다. 이때부터 신문 귀퉁이의 바둑란을 따라 두며 혼자 배우기 시작한 바둑이 어느덧 40여년간 필자의 절친한 지기가 되었고,약하지 않은 1급 수준의 기력을 갖추게 됐다.

아쉽게도 최근에는 바둑판을 마주할 시간이 많지 않아 바둑을 직접 두기보다는 다른 이들의 대국을 감상하거나 바둑 뉴스를 탐독하는 것으로 반상(盤上)에 대한 허기감을 달랜다.

바둑판과 바둑알,두 사람이 앉을 수 있는 공간만 있으면 어디에서든 즐길 수 있다는 점에서 바둑만큼 경제적인 취미도 없을 것이다. 특히 최근처럼 경제가 우울한 상황에서 바둑이 주는 의미는 더욱 크다. 국민의 상당수가 바둑을 취미로 하는 상황에서,이를 통해 잠시나마 어려운 현실을 잊고 재충전을 위한 시간을 갖게 되므로 더없이 좋은 소일거리가 될 수 있다. 얼마 전 휴일 모처럼 기원에 들러 보니 제법 넓은 기원 자리가 꽉 차 있는 것을 보고 역설적으로 최근의 어려운 경제 사정을 실감하기도 했다.

다만 아쉬운 점은 과거 조치훈과 이창호 붐을 거치면서 바둑의 인기가 급상승,많은 꼬마들이 부모 손에 이끌려 바둑 학원을 찾았었다. 그 결과 우리 바둑이 중국과 일본을 넘어 세계를 석권하게 되었지만 최근엔 다소 열기가 식은 듯하다. 꼬마들도 이제 기원에서 골프 연습장으로 이동한 듯한 현실이다.

우리가 바둑을 '기도(棋道)'라고 이야기하는 것은 바둑이 자기 수양에 도움이 되기 때문이다. 필자도 바둑판 앞에 앉을 때 이미 그 바둑을 이길지 질지 대체로 알게 된다. 마음의 상태에서 이미 승패가 결정되기 때문이다. 겸손하고 안정적인 마음가짐으로 바둑을 두면 쉽게 지지 않지만 승패에 집착하다 보면 오히려 패하고 만다.

단순히 기술로서 바둑을 잘 두는 일은 컴퓨터와 같은 기계도 가능한 일이다. 머리로만 두는 바둑이 아니라 가슴으로 바둑을 두는,그래서 그 오묘한 반상의 재미를 진정으로 상완(賞玩)하는 날까지 바둑을 통한 필자의 수양도 계속될 터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