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 판결 뒤집지 못하면 제가 목숨을 끊겠습니다"고 호언장담했던 노영보 변호사가 살아 돌아왔다.

변양호 전 재정경제부 금융정책국장이 지난해 8월 현대차그룹 계열사 채무탕감 로비사건 항소심에서 법정구속됐음에도 그는 최종 승리를 확신했다.

1심 무죄가 2심에서 뒤집혔고 상고심에서 파기환송되는 등 반전을 거듭하는 과정에서 담당 변호사가 겪었을 고충과 소감이 궁금했다.

"생사람 잡을 뻔했지요. "

변 전 국장에 대해 무죄취지로 대법원 선고가 내려진 이틀 뒤인 17일 오전.역삼동의 법무법인 태평양 인근 한 레스토랑에서 만난 노 변호사는 지난 2년6개월간의 악몽 때문인지 아직 분이 풀리지 않은 모습이었다.

그는 요즘도 새벽 2,3시면 눈이 번쩍 뜨일 정도로 장기 재판에 따른 후유증에 시달리고 있다고 했다. 변 전 국장이 현대차 로비스트 김동훈 전 안건회계법인 대표로부터 2억원을 받은 혐의로 구속된 게 2006년 6월.노 변호사가 법복을 벗고 나와 태평양에 둥지를 튼 지 4개월 만이다.

서울고등법원 부장판사직에서 막 나와 전관 변호사로 한창 사건 수임이 몰릴 때 공교롭게도 친구 사건을 맡은 것이다.

"우정으로 견뎠어요. 내 인생도 여기에 걸었죠."

두 사람과 녹십자 허일섭 부회장은 경기중학교 때부터 3총사로 불릴 정도로 절친한 사이다. 두 사람은 또 서로 결혼식 사회까지 봤다.

눈빛만 봐도 속마음을 읽을 수 있는 40년지기 죽마고우와 면담한 뒤 무죄를 확신한 노 변호사는 검찰 수사의 허점을 파고들었다.

김동훈씨에 대한 검찰의 수사기록을 보면서 그가 가장 의아해 했던 부분은 계좌추적 결과.현대차그룹에서 김씨에게 전해진 현금 6억5000만원과 수표 35억원이 모두 그의 처자식 계좌로 들어왔는데 대부분 고스란히 그대로 남아 있었다.

마이너스 통장을 쓰던 김씨가 성북동에 호화 주택을 매입한 점도 수상쩍었다. 노 변호사가 이를 추궁하자 김씨는 현대차로부터 받은 돈은 개인적으로 썼고,부친으로부터 물려받아 집에 쌓아둔 25억원이 실제 로비자금으로 쓰였다고 둘러댔다.

노 변호사는 그러나 "줬으니 줬다고 하는것 아니겠느냐"는 검찰과 법원의 종래 고정관념을 깨고 싶었다. 그는 컴퓨터상에 엑셀 프로그램을 펼쳐놓았다.

그리고는 날짜순으로 김씨의 현금 · 수표 입출금 현황을 빠짐없이 입력해 넣었다. 그랬더니 수입과 지출이 아귀가 맞지 않는 등 금품수수와 관련한 김씨 진술이 거짓이라는 사실을 단박에 확인할 수 있었다.

노 변호사는 판사 시절에도 이 엑셀 프로그램으로 재미를 본 적이 있었다. 바로 안풍사건 항소심 때였다.

1996년 안기부 예산 1190억여원을 신한국당 총선 선거자금으로 전용했다는 의혹에 대해 당시 서울고법 부장판사로 있던 노 변호사는 안기부 위장 계좌 2092개를 엑셀 프로그램에 넣고 날짜순으로 분류해본 결과 들쑥날쑥한 자금 흐름을 발견하고는 1심을 뒤집고 안기부 자금이 아니라고 결론지었다.

"뇌물공여자의 계좌도 반드시 뒤져야 합니다. "

이번 사건을 통해 그가 검찰과 법원에 조언해주고 싶은 대목이다. 그 역시 판사 시절 뇌물사건을 오판한 적이 있었다고 한다.

지금까지도 마음의 상처로 남아있는 그 일로 인해 그는 '피의자에 대한 편견을 갖지 말고 정성을 가지고 사건을 봐야 풀린다'는 값비싼 교훈을 얻게 됐다.

같은 맥락에서 그는 남의 범행에 대해 진술하면 진술자의 형벌을 감해주는 '면책조건부 진술제' 도입에 신중을 기해야 한다고 말한다. 한 사람 사기꾼 때문에 멀쩡한 금융계 엘리트들이 감옥을 오가야 하는 엽기적인 사건은 이번 일이 마지막이 돼야 한다는 지적이다.

글=김병일 기자/사진=임대철 인턴 kbi@hankyung.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