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체스판이 달라졌다!" 미국 브루킹스 연구소 출신의 국제관계 전문가 파라그 카나는 《제2세계》에서 "이제 미국의 시대는 끝났다"면서 "단일 패권 시대가 무너짐에 따라 앞으로 세계 경제의 패권은 '제2세계'(second world)가 결정할 것"이라고 단언한다. 냉전 종식 후 세계 제국으로 군림해온 미국이 이라크 전쟁을 기점으로 무너지기 시작했고 그 자리를 EU(유럽연합)와 중국이 파고 들면서 국제질서의 판도가 확연히 달라졌다는 것이다. 그런데 이들 '신(新)빅3'의 힘도 어느 한 세력의 '유일 패권'으로 이어지지는 않는다는 게 그의 판단이다. 이른바 '다극화 시대'의 세력 판도를 뒤흔들 주인공은 바로 '제2세계'라는 것.

'제2세계'란 한때 지구의 6분의 1을 차지했던 사회주의권을 지칭하는 용어였지만 그는 '저개발 상태의 제3세계에서 선진국 반열의 제1세계로 발돋움하려는 이행기의 국가'들을 통칭하는 의미로 사용한다.

그에 따르면 2세계 국가들은 대체로 1세계와 3세계의 특징을 동시에 지닌 나라다. 저마다 '세계화'라는 지렛대를 이용해 나름의 힘을 행사하면서 미국 · EU · 중국 사이에서 세력 균형을 결정할 이른바 '티핑포인트 국가들'이다.

그는 이들 국가의 움직임을 '자신의 권력기반은 확장하면서 경쟁자의 기반은 갉아먹으려는 슈퍼 파워들의 일급 경기장'에 빗대면서 이들의 결정이 전 지구적 힘의 균형을 좌우할 수 있다고 강조한다. '제국의 연결망이나 영향권이 겹치는 시대에 이들 국가가 둘 이상의 줄을 잡기 때문'이다. 이들은 한 쪽에서 경제적 지원을 받고 다른 쪽에서는 군사적 원조를 맺으며 또 다른 곳과 무역관계를 맺는다.

오바마 캠프의 대외정책팀을 이끈 그는 다극세계의 티핑포인트인 핵심 전략지역 50여 개국을 찾아다니며 이들 국가의 현 주소를 '지정학'과 '세계화'라는 렌즈로 되비춘다.

동유럽을 다룬 1부에서 그는 동서의 가교역할을 자임하며 유럽의 일부로 급속히 편입돼가는 터키의 역할에 주목한다. 터키는 신 오스만 제국의 공격성과 자부심 때문에 EU와 긴장상태를 유지하고는 있지만 유럽과 국경을 접한 시리아 · 이라크 · 이란을 안정시키는 '유럽의 병기' 같은 역할을 할 수 있다는 것이다. 터키는 파이프라인과 교통망을 통해 석유가 풍부한 카스피해 연안과 유럽을 잇는 통로이기도 하다. 그러나 러시아에 대해 그는 인구와 영향력의 감소로 '근육이 살아 움직이긴 하지만 시들어가는 중'인 약체로 평가한다.

중앙아시아에서는 빅3의 경쟁을 이용해 실속을 챙기는 '등거리 외교'의 카자흐스탄을 집중적으로 조명한다. 중국이 카자흐스탄의 석유를 서부지역으로 들여오는 파이프라인 건설 자금을 대고,유럽은 지속적인 투자를 제공하며 카자흐스탄에 유럽식 제도를 이식하려고 애쓰지만 이 모든 것이 슈퍼파워의 의도가 아닌 '카자흐스탄 방식'에 따라 이뤄지는 현실을 눈여겨 보라는 것이다.

'미국의 안마당'이던 라틴 아메리카에서도 변화의 물결은 거세다. 차베스가 주도하는 베네수엘라는 석유를 무기로 독자적인 입지를 구축하면서 유럽의 암묵적인 지원과 중국의 저돌적인 침투를 역이용하고 있다. 냉전기에 미국의 충실한 동반자였던 브라질도 중국과 전략적 동맹 관계를 맺고 마음대로 '지렛대'를 움직인다.

중동지역에서는 리비아와 사우디아라비아,이란 등 무슬림 산유국들이 다채로운 제휴관계를 통해 영향력을 키워가고 있다.

동아시아는 어떤가. 말레이시아와 태국은 미국과 합동군사훈련을 이어가는 동시에 중국과도 방위협정을 맺고 있으며 베트남 또한 독자노선을 걷는 모습이다.

한국에 대해서는 '전형적인 원조수혜국에서 제1세계로 발돋움한 아시아의 위대한 성공사례'로 평가하면서 '자신감이 높아진 한국은 반세기도 넘게 자국 땅에 주둔해 온 미군의 유용성을 두고 미국과 대립을 빚고 있으며,미국과 한국과의 관계는 미 · 일 관계보다 훨씬 더 긴장상태에 있다'고 분석한다. 또 '중국과 한국은 북한을 자본주의적으로 식민화하는 데 서로 협력하는 관계'라며 '만일 북한이 무너지게 되면 북한이 중국과 한국에 의해 핀란드화(Finlandization)할 가능성이 크다'고 내다본다.

인도 출신인 저자는 러시아나 일본,인도에 대해 군사적으로나 다른 면에서나 전 지구적 존재가 될 수 없다고 평가한다. 이들 국가는 '세 슈퍼 파워의 지배력을 보강하거나 약화시킬 수는 있지만 지배를 막지는 못하는 균형자'일 뿐이라는 것이다.

이러한 분석과 평가는 다소 친미적인 시각에 기대고 있지만 그는 '이미 2세계로 진입한 중국이 강력한 상승기류를 타고 있고 유럽 또한 주변 2세계들을 빨아들이며 영향력을 키우고 있는 상황에서 미국은 더 이상 세계가 자신의 세상이 아님을 깨달아야 한다'고 경고하면서 세계 권력의 대이동이 본격적으로 시작됐다는 것을 일깨운다.

고두현 기자 kdh@hankyung.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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프랑스 경제학자가 쓴 미국 쇠망론.그는 미국 몰락의 기점이 9 · 11테러가 아니라 1997~1999년 국제금융위기라면서 경제분야의 구조적인 허점과 이라크 전쟁이 겹쳐 본격적인 하락의 길을 걷기 시작했다고 분석한다. 그는 미국의 패권이 사라진 미래의 모습에 대해 '일극적 제국의 시기가 될 수 없지만 그렇다고 다극적 동거의 시기가 되지도 않을,분쟁과 혼란의 시기가 될 것'으로 전망한다. 따라서 국제기구 등을 통한 국제적 합의도출 능력의 약화,주권국가 간 동맹 논리 강화라는 결과로 이어질 것이라는 전망도 내놨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