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같은 보석이라도 착용하는 사람에 따라 제각각의 빛을 발휘하죠.다듬지 않은 원석에서 그 사람에게 정말 어울리는 보석을 찾아주는 게 제가 하는 일이에요."

'럭셔리 1번지'로 통하는 청담동에서 아모르 보석갤러리를 운영하는 왕인희씨(53)는 8년차 보석 디자이너다.대개 디자이너들이 만들고 싶은 대로 작품을 만들어 진열해 놓고 고객의 선택을 기다리지만,그는 매장을 찾은 고객들과 먼저 소통한 뒤 영감을 얻어 그 사람만을 위한 작품을 만들어준다.이는 까르띠에,티파니 등 각종 명품 브랜드들이 즐비해 웬만한 디자인이 아니면 명함을 내밀기 힘든 청담동에서 왕 디자이너가 다수의 마니아층을 보유할 수 있었던 이유로 꼽힌다.

그는 "귀한 보석이라고 장농 속에 고이 모셔 두는 것은 보석의 진정한 가치를 훼손시키는 일"이라며 "사람과 함께해 그 사람이 돋보이도록 할 때 비로소 제값을 발휘한다"고 강조했다.딱 맞는 의상처럼 격식에 맞는 디자인으로 고객들의 신체 일부에서 빛나는 작품들을 볼 때면 그제서야 일의 보람을 느낀다.

'사람과 함께하는 디자인'을 강조하는 왕 디자이너는 작품에 대한 디자인 영감을 고객과의 대화로 이끌어 낸다고 귀띔했다.매일 오전 10시부터 오후 5시까지 매장에서 직접 고객들을 상대하는 시간은 그가 다양한 아이디어를 얻는 소중한 순간이다.대화를 통해 얻은 고객 개개인의 미소.눈빛.몸짓 등을 하나의 이미지로 버무려 무의미한 원석을 스토리가 있는 보석으로 만들어 낸다고.

그가 처음부터 보석 디자이너를 꿈꾼 건 아니었다.1979년 홍익대 미대에서 서양화를 전공하고 졸업하자마자 바로 결혼에 골인한 평범한 주부였다.그러나 건축업에 종사하는 남편을 따라 24년간 사우디아라비아,미국,인도네시아,필리핀 등지로 돌아다닌 덕에 잠재된 예술적 재능을 살릴 수 있는 기회를 찾게 됐다.보석 디자인에 눈을 뜬 것은 2000년부터였다.진주가 많이 나는 필리핀 민다나오섬에서 진주 매장을 운영하게 됐고,진주 도매시장이 서는 날이면 점심도 거르며 질 좋은 진주를 찾아 헤매고 다니면서 진주의 매력에 푹 빠졌다.

그래서 수많은 보석 중에서도 가장 자신 있는 분야는 진주 디자인.그는 "보통 진주 하면 우아하고 심플한 보석으로 여기는데 디자인에 따라 다이아몬드 못지 않은 화려함을 발휘한다"며 심플한 탑스타일의 웨딩드레스를 화려하게 변신시킬 수 있는 작품을 소개했다.다이아몬드의 찬란한 빛이 질투심을 발휘할 만큼 은은한 광택이 감도는 수백개의 크고 작은 진주들이 눈부신 자태를 뽐냈다.이외에 옐로 진주,핑크 진주,크림색 진주 등 다양한 진주들이 그의 손을 거쳐 목걸이,티아라,귀걸이,반지 등의 작품으로 변신해 원목 진열대를 장식한다.

그는 이제 진주를 멀리서 봐도 진짜인지,가짜인지 구별할 정도다.멀리서 햇빛에 반사되는 진주 빛이 너무 반짝거리면 가짜라고 한다.얼핏 보면 가짜 진주가 더 화려해 보이지만 자연스럽고 은은한 빛을 내는 진짜 진주에는 감히 견줄 수 없다는 것.이와 함께 필리핀에서 진주가 많이 생산되기는 하지만 모든 사람이 알아주는 질 좋은 진주는 호주산이 최고라고 그는 살짝 귀띔했다.

진주 전문 디자이너라고 불러도 손색이 없지만 그가 특별히 좋아하는 보석은 따로 있다.핑크 루비가 바로 그것.흔하지 않고 신비로운 핑크빛이 어떤 디자인에도 잘 어울리기 때문이다.보통 루비 하면 빨간색을 떠올리지만 왕 디자이너의 매장 진열대에는 핑크색 루비로 만든 주얼리들이 진주 다음으로 많은 자리를 차지하고 있었다.

전문적으로 보석 디자인 교육을 받지 않았지만 회화를 전공했던 미술학도답게 특유의 예술적 감각으로 특별한 디자인들을 만들어 냈다.그는 "조금씩 만들어 숍에 내놓았더니 필리핀을 찾은 외국 관광객부터 현지 부유층까지 제 디자인을 찾을 정도로 반응이 좋아 본격적으로 보석 디자인을 직업으로 삼게 됐다"고 설명했다.

그가 지금까지 수만개의 보석 작품을 만들어내면서 가장 기억에 남는 작품은 무엇일까.그는 단번에 진주.다이아몬드.루비 등을 조합시켜 만든 브로치라고 꼽았다.그는 "쌀알 크기의 핑크 진주로 장식한 꽃 무늬 브로치였는데 만들어 놓고도 너무 마음에 들어 직접 하고 다니다가 4년 전 중국 고객에게 팔았다"고 아쉬워했다.한 달에 두 번 이상은 꼭 세계 각지를 돌아다니며 원석들을 수집하고 있지만 그 이후로 똑같은 핑크 진주를 찾을 수는 없었다고 한다.

평범한 주부에서 한국과 필리핀을 오가며 보석 디자이너로 왕성하게 활동하는 왕씨가 바라는 것은 지극히 소박하다.많은 디자이너들이 티파니나 까르띠에처럼 비싼 값을 불러도 사람들이 동경하는 보석 브랜드로 키우겠다는 원대한 포부를 보이지만,그는 "평생 여러 사람과 어울려 부담 없이 즐길 수 있는 보석을 디자인하는 게 전부"라고.

글=안상미 기자/사진=양윤모 기자 saramin@hankyung.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