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릴 적 기억만큼 강렬한 것도 없다.

인생과 세계를 바라보는 잣대가 되기 때문이다.

내가 나고 자란 남아프리카공화국 음푸말랑가 지방,그 가운데서도 '블라이드강 협곡'은 내게 그런 기억의 장소로 남아 있다.

정확치는 않지만 7~9살 무렵 부모님과 함께 블라이드강 협곡을 처음 찾았다.

그 때 나는 자연의 웅장함에 완전히 매료됐다.

생각해보라.얼마나 멋지고 신비로웠으면 이제 막 학교 다니기 시작한 꼬마가 그런 감동을 받았겠는가.

이 협곡은 규모면에서 세계 3대 협곡의 하나로 손꼽힌다.

1000m의 바위 절벽들이 솟았다고 해야 하나,아니면 땅 속으로 꺼졌다고 해야 하나.

어찌됐든 장관을 이룬다.

협곡을 둘러싸고 울창한 초목이 뒤덮고 있는 보기 드문 곳이다.

아프리카 전통 가옥의 모양을 한 '론다벌'(둥근 심장이란 뜻)이 협곡 위에 나란히 자리하고 있다.

신이 세상을 내려다보는 창이란 이름(God's Window)의 전망대에서 이런 절경을 즐길 수 있다.

근처엔 블라이드강의 강물이 소용돌이치면서 바위를 오목하게 깎아낸 '부크스 럭 팟홀'(Bourke's Luck Potholes) 이란 신비로운 곳도 있다.

단단한 다이아몬드 조각들과 사금,모래 등이 물 속에서 함께 수천년 동안 바위를 깎아내 숟가락처럼 오목하게 파들어간 것이다.

그 위의 다리에서 내려다보면 완벽한 원 모양을 하고 있다.

바닥을 모를 정도로 깊기도 하다.

'자연의 힘은 믿을 수 없을 정도로 놀랍다'는 생각 밖에 나지 않는다.

어른들이 허리케인과 쓰나미의 위력에 놀라는 것에 비유할 수 있을까.

개인적으론 내 인생의 가장 소중한 추억이 담겨져 있는 곳이다.

나는 프리토리아대학 재학 시절,지금의 아내를 같은 대학에서 만났다.

아내도 블라이드강 협곡에서 아주 가까운 오릭스타드 태생이다.

어릴 적 전율로 다가온 감동은 아내에 대한 사랑으로 옮겨붙었다.

처음 아내 집에 인사하러 가던 우리는 부크스 럭 팟홀을 지나쳤다.

그 다리 위에서 우리는 석양을 배경으로 첫 키스를 나눴다.

이 정도면 '운명적 만남'이 아닌가.

결혼 이후 셋까지 불어난 아이들의 손을 잡고 나와 아내는 다시 이곳을 찾았다.

자연의 주기와 사람의 주기는 비슷한가 보다.

인생을 계절에 비유하면 5명의 손자들은 '봄'이고 나는 '가을'로 접어들었다.

염색을 해서 금발로 보이지,원래는 은발로 머리가 다 세었다.

아무튼 다음에 남아공에 갈 때는 손자 손녀들과 사위까지 모두 10명의 가족을 데리고 블라이드강 협곡을 찾을 것이다.

거기엔 협곡을 오르내릴 수 있는 작은 등산로가 있다.

내려가면 하룻밤을 슬리핑백에서 유숙할 수 있는 캠핑장도 있다.

캠프파이어를 지피고 바비큐에 와인도 곁들이며 아프리카의 낭만을 즐길 수 있다.

다음 날 아침,문명과 동떨어진 아프리카 자연 한 가운데서 잠이 깨면 그야말로 평화가 무엇인지,천국이 어떤지 알 수 있게 된다.

이곳은 해발 800m 고지라서 그리 덥지 않다.

가을엔 낙엽도 볼 수 있다.

겨울엔 아침 기온이 3~4도까지 떨어져 상쾌한 기분을 느끼게 한다.

블라이드강 협곡 인근엔 유명한 크루거 국립공원이 있다.

공원은 구비구비 흐르는 강과 건조한 모파네 평원에 이르기까지 다양한 얼굴을 갖고 있다.

이곳에서는 코끼리와 마주칠 수도 있는 스릴 넘치는 골프도 가능하다.

하이킹 래프팅 카누 패러글라이딩 등 어드벤처 스포츠도 만끽할 수 있다.

또 '필그림 레스트'(Pilgrim's Rest)란 마을은 과거 골드러시 시절 금광촌의 모습을 떠올리게 하는 이색적인 곳이다.

남아공은 끝없이 펼쳐진 해안,웅장한 산맥,아프리카 최대 규모의 야생의 세계,사막과 울창한 숲 등 상상할 수 있는 모든 경관을 가졌다.

그 중에서도 블라이드강 협곡이야말고 신이 남아공에 내려준 최고의 선물이라고 나는 자신있게 말하려 한다.

문의:남아공대사관 www.southafrica-embassy.or.kr 정리=장규호 기자 danielc@hankyung.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