패션디자이너 김진씨(30)는 '백조(白鳥)'다.


하지만 그가 처음 패션디자인을 공부하겠다고 이탈리아로 건너갔을 때부터 그런 것은 아니었다.


"처음엔 학교에서 완전히 '미운오리새끼' 취급을 받았죠.말이 전혀 통하지 않아 엉뚱한 과제를 내기도 했어요. 치마를 그려오라고 하면 바지를 해가는 식이었으니까요."


9년이 지난 지금 그는 톱 클래스 디자이너 '존 리치몬드(John Richmond)'의 컬렉션을 돕는 정식 밀라노 디자이너로 대접받는다.


어떻게 그럴 수 있었을까.


"보통의 동양인들처럼 이름 난 학교에서 간판 다는 것에 연연하지 않아서죠." 김씨는 자신의 성공 비결을 이렇게 잘라 말했다.


그는 동국대 조소과를 졸업하고 패션스쿨 '에스모드 서울'에서 1년간 수학한 후 이탈리아 밀라노의 세계적인 디자인 명문 '에우로페오'에 들어가는 데 성공했다.


"세계적으로 이름 난 마랑고니나 에우로페오 같은 패션 스쿨에 가보면 한국인을 비롯한 동양인들이 참 많아요.


하지만 이들 중에 현지에서 성공하는 사람은 많지 않습니다.


패션도 산업인데 현장에서 필요한 '드래핑(마네킹에 직접 옷 본을 뜨는 작업)'같은 걸 이런 데선 당연히 배우고 왔을 걸로 보고 가르쳐주지 않거든요."


그래서 그는 어렵게 들어간 에우로페오를 제 발로 걸어나와 종이 패턴 이외에 드래핑도 배울 수 있는 피렌체의 '폴리모다'라는 학교로 옮긴다.


세계 각국에서 재능있는 디자이너 지망생이 몰려드는 밀라노에서 '예술적 성공'을 꾀하기 보다 패션산업의 현장에서 바로 통하는 실무형 인재가 되겠다는 생각에서였다.


폴리모다 졸업 후 밀라노의 유명 패션 업체 여러 곳에 이력서를 넣었지만 패션계에서 밀어주는 사람 하나 없는 동양인에게 면접 볼 기회는 많이 찾아오지 않았다.


"운 좋게도 평소 좋아하던 존 리치몬드 컬렉션에서 연락이 왔어요.


포트폴리오를 들고 한번 찾아오라고.대충 보더니 작업실로 데려가 원단을 던져 주며 즉석에서 디자인한 옷의 본을 떠보라는 요구를 하더라구요." 간판보다는 실속을 택한 김씨의 선택이 빛을 발하는 순간이었다.


입사 5년차에 접어든 그는 이제 존 리치몬드 컬렉션이 속해 있는 팔베르(Falber)사에서 아파트까지 제공하며 잡아두려 하는 주요 디자이너로 컸다.


회사 작업실에서 영국인 6명,이탈리아인 1명과 함께 일하는 김씨는 한 벌에 4000유로(약 500만원)가 매겨지는 최고급 드레스를 디자인한다.


최근에는 한국의 갤러리아 백화점에서 그가 일하고 있는 존 리치몬드 컬렉션을 명품관에 입점시키기로 했다.


같이 일하는 서양인 동료들은 그에 대해 "매운 고추를 잘 먹는 독종 한국인"이라고 평한다.


일 년에 두 번 열리는 '밀라노 컬렉션'을 준비하느라 삼일 밤낮을 새워 일하고 나서 자신들이 피곤에 쩔어 집에서 곯아 떨어질 때 김씨는 런던,파리 등지의 패션 거리를 돌아보러 떠나기 때문이다.


"늘 새로운 것을 접하지 않으면 퇴보할 수밖에 없는 게 패션 디자이너예요. 한국에서 숱한 인기가수들이 떴다 지는 것처럼 밀라노에서는 디자이너가 그렇거든요."


자신의 컬렉션을 열 때까지는 부모님도 이탈리아에 못 오게 했다는 김진씨.낯선 타국 땅에서 꿈을 이루기 위해 뛰는 그는 정말 '아름다운 독종'이었다.


차기현 기자 khcha@hankyung.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