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전쟁에서 양쪽 시력을 다 잃고 온 몸에 상처를 안은 채 죽지 못해 살아온 세월이 벌써 50년을 넘겼지만 아직도 고통은 끝나지 않았다" 20대 초반 열혈 청년의 나이에 한국 전쟁에 나가 두 눈을 실명한 것도 모자라 몸 곳곳엔 파편이 박힌 중증 상이군인들이 모여 살고 있는 마산시 회성동 '광명촌'. 보릿고개와 산업화의 고된 시대를 지나 선진국 대열에 접어들었다는 시대를 '소리'로만 들으며 살아온 이들에게도 세월은 비켜가는 법이 없어 모두 70대이상이다. 지난 75년말 들어선 광명촌엔 당초 33가구가 입주했지만 30년이 된 지금, 17명은 세상을 떠나 미망인들만 남았고 생존한 상이군인 11명이지만 그나마 1명은 정신분열증까지 심해 병원신세를 지고 있다. 이 곳엔 앞도 보지 못한 채 차별과 생활고에 시달려온 상이군인들은 물론 일찍 남편들을 보낸 미망인들의 처절한 삶이 녹아있다. 광명촌은 휴전 직후 경남지역 실명 상이군인들의 딱한 사정을 고려해 정부와 마산시가 하천부지를 내주고 건축비를 융자해줘 들어섰다. 겨우 생활근거지는 해결했지만 몇 푼 안되는 연금으로 생활하랴, 자녀들 공부시키랴, 융자 원금 갚으랴 이들의 고충은 전쟁 상처와 함께 말로 다할 수 없었다. 휴전개시 1시간전인 1953년 7월 27일 밤 11시 포탄 파편을 맞아 실명하고 머리 등에 4∼5개의 파편을 지닌 채 지금껏 살아온 광명촌 회장 최숙경(78)씨. 6년전부터 최근까지 위암과 맹장수술을 잇따라 했고 지금도 귀와 머리가 아파 점자 책도 오래 못본다. 사백환(73)씨는 실명에다 한 쪽 손이 없고 상반신에 3도 화상을 입어 이 곳에선 상처가 가장 심각한 상태로 집 밖 출입도 잘 하지 않는다. 화학탄 오발로 온 몸을 다쳤다는 그는 7년간 병원신세를 지고 제대해 횟수를 셀 수 없을 정도로 수술을 했지만 지금도 병원을 계속 다니고 있다. 다행히 그에겐 다친 몸을 보고도 봉사를 자청하며 20살의 나이에 결혼을 결심해준 아내 강정자(67)씨가 있었다. 강씨는 "얼마전까지만 해도 지팡이를 짚고 밖으로 나가면 사람 취급도 안해줘 멱살잡고 싸움도 많이 했다"며 "이렇게 모여 살지 않았다면 위로해줄 사람도 없어 벌써 저 세상 사람이 됐을 것"이라고 말했다. 강씨는 이어 "연금을 평생 모아봤자 5천만원도 안돼 약값 하고 나면 입에 풀칠 하기도 힘들었다"며 "그런데도 정부가 최근 일부에 대해 일시불로 억대의 돈을 주고도 연금 혜택을 계속 준다는 말을 들었다"고 분통을 터뜨렸다. 최고령인 장갑철(81)씨는 외부 방문객이 있다는 말을 듣고 경로당에 나와 "다친 상태에서 제대한 후 고향엔 형제는 많고 먹을 것은 없어 죽으려고 생각도 했다"며 "지금은 아무 바랄 것도 없다"고 담담한 표정을 지어보였다. 남편을 먼저 떠나보낸 김복남(74.여)씨와 김숙선(73.여)씨는 "남편은 꼼짝을 못하고 죽도 제대로 못먹는 처지에 생선.채소 장사와 농사일에다 안해본 일이 없다"고 손을 내저었다. 김복남씨의 큰 아들은 "부모 형제가 먹고 살 수만 있다면 나는 죽어도 좋다"며 제대를 1달가량 남겨놓고 휴가를 나왔다가 월남전에 자원하기도 했다고 한다. 최 회장은 22일 광명촌을 방문한 김영환 마산해양수산청장이 "어르신들 덕분에 저희들이 생업에 종사할 수 있다"며 인사를 건네자 "요즘 사람들은 하늘에서 떨어진줄 알고 지가 잘나 사는 것으로 생각한다"고 묵혀둔 속내를 비치기도 했다. 또다른 미망인은 "6월이 지나면 외부 사람은 그림자도 찾기 힘든다"며 "우리가 이젠 숫자도 적고 나이를 먹으니 괄시하는 것 아니냐"고 목청을 높였다. (마산=연합뉴스) 정학구 기자 b940512@yna.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