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설에 동서들이 같이 모였는데, 내가 말을 알아듣지 못하고 빨리빨리 못한다고 옆구리를 발로 걷어찼다" 한국 남편을 둔 필리핀인 R(29)씨의 하소연이다. 이처럼 한국 남성과 결혼한 동남아 여성들이 한국에서 겪는 애로는 눈물겨울 정도다. 보건복지부가 한국문화인류학회에 용역 의뢰, 최근 발간한 `한국 소수자집단의사회경제적 실태와 복지증진방안' 연구보고서에서 이런 실상이 드러났다. 부끄러운 우리 사회의 한 단면이다. 이 보고서는 16개 시.도 가운데 1개시.1개도를 선정, 이곳에 거주하는 필리핀여성들을 일일이 개별 접촉한 뒤 작성한 것이다. 필리핀 여성의 배우자 방문 동거비자 발급은 지난 1990년 91명에서 2000년 3천24명, 2001년 3천557명으로 대거 늘어났다. 최근 들어선 베트남 여성이 많이 입국한다고 한다. 보고서에 따르면 필리핀 여성의 유입은 크게 세가지 경로를 통한다. 상업적 목적을 가진 사설중개업자의 개입, 또는 한국인과 결혼한 친구.친지의 소개 등이다. "남편이 결혼비용으로 모두 600만원인가를 냈다고 했다. 그 돈을 갚지 않으면돌아갈 수 없다고 했다. 함정에 빠진 것이다"(결혼생활 5년째인 L씨.32), "한국에와서야 남편이 전혀 다른 사람이라는 것을 알았다"(결혼생활 7년째인 H씨.37) 실제 필리핀 여성중 상당수는 남편에 대해 사전 정보가 없거나 잘못된 정보를갖고 입국, 뒤늦게 후회를 한다. 그러다 정 못 견딜 것 같으면 필리핀으로 돌아가려하나 이 때는 `결혼 비용'이라는 등의 덫에 걸려 옴짝달짝할 수 없는 상태에 빠지는경우가 적지 않다. 보고서는 "필리핀 여성들이 한국은 부자나라이기 때문에 남편될 사람이 아주 돈이 많다. 한국에 가면 편히 잘 살 수 있고 필리핀 가족도 도와줄 수 있다는 이야기를 듣는다"고 전했다. 그러나 한국에 도착한 뒤 "부자로 알던 남편이 농.어촌에 살며 살림살이가 형편없다는 것을 발견한다. 시집식구와 같이 살아야 하는 삶도 버겁기만 하다. 귀국하려 면 남편이 쓴 비용을 갚아야 한다는 말을 듣는다. 매매 대상이 됐다고 생각하지만어쩔 수 없다"고 보고서는 덧붙였다. 갚아야 할 결혼비용은 600만-700만원부터 1천만원까지 다양하다. 의사 소통 단절과 문화 격차도 결혼생활에 심각한 장애로 등장한다. 남편이 영어를 배우는 경우가 거의 없기 때문에 한국말을 배워야 하나 체계적으로 가르쳐주는곳이 없다. 더욱이 아이를 낳게 되면 집안에만 머물게 돼 말을 배울 기회는 더 줄어든다. 가부장적인 가정 분위기, 자녀 양육 방식 차이 등도 쉽게 극복하기 어려운 문제들이다. 결혼 3년6개월째인 J(32)씨는 필리핀에 있는 가족에게 돈을 보내려고 일을 하려고 할 때 남편이 폭력을 썼다고 한다. 보고서는 "성적인 매력, 영어 구사, 높은 교육수준에도 불구, 필리핀 여성은 가난한 나라에서 왔다는 사실 때문에 언제나 한국 여성보다 하위 위계에 속한다"면서"필리핀 여성과의 결혼이 (한국 남성에게는) 상실된 남성성을 회복하거나 아내를 통제하려는 방식으로 작용한다"고 분석했다. 예를 들면 결혼비용이라는 족쇄, 경제적 통제 등이다. G(35)씨는 임신을 하고난 다음에야 5만원씩 돈을 받았다고 한다. 같은 필리핀 여성들끼리 만나는 것조차엄격히 막는 남편들도 없지 않다. 심지어는 남편들이 배우자 통제 수단으로 한국 국적 취득에 동의하지 않는 경우도 많다고 보고서는 전했다. 그러나 필리핀 여성들에게도 문제가 없는 것은 아니다. 결혼생활 7년째인 B(36)씨는 "필리핀 여성 중에는 한국에 와서 일하기 위해 결혼을 디딤돌로 사용하는 사람도 있다"면서 "현실을 직시하고 여기의 삶에만 신경써야 한다"고 충고했다. 보고서는 "필리핀 주부들이 경험하는 어떤 부분은 조선족 중국인, 베트남, 태국,몽골 등 다른 외국인 주부들도 공유하고 있을 것"이라며, 결혼중개업자에 대한 관리.감독 강화, 한국어 및 한국문화 교육 시스템 구축, 외국인 전용 쉼터 설립, 외국인배우자 전문상담센터 설치, 국적법 개정 등을 제안했다. (서울=연합뉴스) 황정욱기자 hjw@yna.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