외환위기가 몰고온 공인회계사 시험열풍을 서울대 경영대 회계학 강의실도 학생들이 가득찼다. 학생들의 마음을 아는지 모르는지 유독 '시험에 안나오는 것'만 가르치는 노(老)교수가 있었다. 묵묵히 회계이론을 강의하던 그는 '너희들은 기계적인 문제풀이법보다 회계학의 원리와 의미를 알아야한다'고 마음 속으로 되새기고 있었을지 모른다. 40년 세월 대학 강단을 지키며 70년대 회계학의 바이블 "현대회계이론" 등 20여권의 저서와 70여편의 논문을 남긴 노 교수. 새로운 연구방법론과 기법을 도입,한국 회계학의 토대를 굳건하게 다진 회계학계의 거목 시묵(詩默) 이정호 서울대 경영대학 교수(65)가 9일 서울대에서 정념퇴임 고별강연을 가졌다. "요즘 학생들이 회계학을 시험을 위한 고시과목으로만 생각하는 경향이 많아 안타깝습니다. 회계학의 근본 원리와 의미를 제대로 배워줬으면 좋겠어요" 이같은 그의 바람은 회계학은 기업경제활동에 대한 정확한 정보를 전달하는 데 목적이 있다는 소신으로 이어진다. "최근에 불거진 분식.부정회계 등은 회계학을 제대로 이해하지 못했기에 생긴 부작용이지요. 회계의 사회적 책임과 윤리에 대한 인식에 재정립돼야 할 시점입니다" 이 교수는 그동안 한국 회계학은 정부의 정치적.경제적인 논리에 따라 왜곡된 점도 적지 않았다고 지적했다. "경제성장을 위해 정부는 회계기준을 정책수단으로 많이 이용해왔습니다.기업순익 규모에 큰 영향을 주는 유가증권 평가법은 10번 이상 개정돼왔죠" 이 교수는 "얼마전 한 고위 법조인이 '법조인이 법률 기술자나 상인으로 전락한다면 국민의 존경을 받기 힘들다'는 말을 듣고 무척 놀랐다"며 "아직까지 국민 저변에 사농공상(士農工商) 의식이 깔려있는 게 회계학 더 나아가 경제발전을 가로막고 있다"고 강조했다. 자신을 회계학에 입문하게 이끌어준 은사 고 이상훈 교수의 따뜻한 사랑을 한번도 잊은 적이 없다는 이 교수. "6.25로 요즘 막국수집 등받이 없는 의자에 앉아 회계학을 배웠다"는 그는 50년전 당시 자신의 나이 또래 학생들의 배웅을 받으며 정든 강의실을 떠났다. 글=서욱진 기자 venture@hankyung.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