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월드컵을 통해 처음으로 태극기가 멋지고 사랑스럽다는 생각을 하게 됐어요." 대학에서 의상디자인을 전공하는 최윤미씨(22). 지난달 10일 16강 티켓을 놓고 한국과 미국이 한판 승부를 벌인 대구 월드컵경기장 앞에서 만난 그는 '태극기' 그 자체였다. 여러 장의 태극기를 직접 가위로 자르고 재봉틀로 박음질해 만든 '태극기 원피스'는 그의 가슴과 몸에 휘감겨 멋스럽게 움직이고 있었다. "국기라고 해서 특별히 금기시할 필요가 있나요.이렇게 하면 오히려 태극기에 친밀감을 느낄 수 있어 좋아요." 월드컵 열풍과 함께 우리 사회에 팽배했던 엄숙주의와 금기를 깨뜨리는 여러가지 긍정적 조짐들이 나타나고 있다. 그중 가장 두드러진 것이 국민적 자부심과 자존심의 상징인 태극기에 대한 인식의 변화. 수십미터 높이의 국기게양대 위에서 '고고하게' 펄럭이던 태극기가 스카프 스커트 두건 망토 등 각종 패션 액세서리로 변신해 우리 곁으로 성큼 다가온 것이다. 권위적인 태극기에 익숙해져 있던 중장년층은 물론 신세대들도 국기게양대에 걸려 있던 태극기를 끌어내려 몸에 두르고 자랑스런 한국인으로서의 자부심을 맘껏 느낄 수 있었다. 장롱 안에 고이 접혀진 채 신성시됐던 태극기는 월드컵을 통해 우리 곁에서 살아 숨쉬고 있다. 길거리로 쏟아져 나온 시민들은 태극기라는 매개체를 통해 '우리는 하나'라는 공동체 의식으로 결속됐다. 우리 사회에 팽배해 있던 이러한 금기와 고정관념의 파괴는 새로운 아름다움을 일깨워 주고 있다. 전문가들은 이같은 태극기의 일상화를 경외의 대상을 사랑할 수 있는 수평적이면서 민주적인 권위의 창출현상이라고 분석했다. 연세대 사회학과 김호기 교수는 "권위주의적 사회 풍조가 글로벌 시대에 맞춰 허물어지고 있음을 보여준 방증"이라며 "월드컵은 한국적인 금기의 틀을 깨뜨릴 수 있는 유연한 사고와 행동양식이 확산될 수 있는 계기로 작용했다"고 말했다. 이정호 기자 dolph@hankyung.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