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상과 종교, 지역과 빈부차가 '대한민국'이라는 용광로 속에 녹아들어 하나됨을 경험했다" 한국 축구대표팀의 월드컵 16강 진출은 끝없는 패배로 점철된 48년간의 월드컵도전사를 종결시켰다는 단순한 한풀이의 의미에 그치지 않았다. 4천700만 한국 국민들은 지난 45년 건국 이후 처음으로 사상과 종교, 지역감정을 넘어선 '국민통합'의 희열을 몸 구석구석까지 느낄 수 있었다. 사상 첫 16강 진출을 확정지은 14일 밤 전국적으로 280만명의 시민들이 거리로 뛰쳐나왔고, 한국의 승리가 확정되는 순간 땀과 눈물로 범벅이 된 얼굴을 서로의 가슴에 묻고 기쁨을 나눴다. 밤늦도록 감격을 주체하지 못해 차도를 점거한 거리의 응원단이 지나가는 자동차를 빈 물병으로 두드리며 `대∼한민국'이라는 4박자의 구호를 외치면 운전자는 경음기로 박자를 맞추며 호응했다. 연령도, 성별도, 출신지역도, 학력도 다른 생면부지의 타인들이 손을 잡고 이마를 맞댔다. 지금까지 어떤 정치세력도, 종교지도자도 이루지 못했던 국민통합이 축구를 통해 완성되는 순간이었다. 별다른 규칙도 없이 각팀 11명의 선수와 가죽공만 있으면 즐길 수 있는 축구가 정치와 종교를 초월하는 힘을 갖고 있다는 사실은 이미 널리 알려진 사실이다. 프랑스가 자국에서 열린 지난 98년 월드컵에서 챔피언이 되자 프랑스 국내외에서는 월드컵 우승이 프랑스의 국민통합에 지대한 공헌을 했다고 평가했다. 이는 프랑스 대표팀이 알제리 출신인 주장 지네딘 지단을 포함, '인종 전시장'을 연상케 할 만큼 다양한 인종과 언어, 문화 및 지역 출신 선수들로 구성돼 있는 점을 주목했기 때문이었다. 축구를 통해 힘들게 이뤄낸 국민통합은 월드컵이 끝난 뒤에도 우리사회에 큰 영향을 미치리라는 전망이다. 이화여대 사회학과 함인희 교수는 "월드컵에서 우리 사회가 보여준 국민통합은 밑에서부터의 통합이라는 점에서 유신시절 위에서 강요한 획일화된 통합과는 성격이 다르다"면서 "월드컵이 끝난 뒤에도 국민들은 이미 세계에 보여준 잠재력을 바탕으로 또다른 사회통합을 이뤄낼 수 있을 것"이라고 예측했다. 함교수는 "이번 월드컵에서 우리 대표팀은 16강이라는 결과보다는 학연과 지연에 얽매이지 않고 합리적인 목표설정과 페어플레이라는 과정을 통해 국민들을 감동시켰다"면서 "월드컵 이후 또 한번의 정치적 실험인 대선을 앞둔 정치권이 주목해야 할 대목"이라고 말했다. 서울대 사회학과 서이종 교수는 "지금까지 기성세대는 정치적으로 사회적인 문제를 해결해야 한다는 근대적인 사고방식에서 벗어나지 못했지만 월드컵 기간 우리국민들은 스스로 하나가 되어 문제를 해결해나가는 성숙한 시민사회의 모습을 보여줬다"고 분석했다. 서교수는 "월드컵 기간 전국 곳곳에서 목격된 사회적 통합의 모습은 앞으로 우리 시민사회의 성장 가능성이 무궁무진하다는 증거"라고 말했다. 덕성여대 사회학과 김종길 교수도 "현재 보여지고 있는 사회적 통합의 에너지를 수렴할 수 있는 정치적 엘리트의 출현이 필요하다"고 말했다. '웰 컴투 코리아' 캠페인을 비롯, 다양한 월드컵 문화운동을 펴고 있는 밝은미소 운동본부의 최은영 사무국장은 "외국에서는 지금 한국 사회를 뜨겁게 하나로 만들어 내고 있는 월드컵의 승리 분위기에 대단히 놀라고 있다"면서 "월드컵을 통해 한국민 모두가 함께 기뻐하고 즐거운 마음이 되어 누구에게나 관대해지는 모습을 보여주면서 세계속의 한국인과 한국의 위상은 자연스레 높아져가고 있다"고 말했다. 경실련 고계현 정책실장은 "그동안 우리는 국민의 단합된 의지를 모을 만한 신바람 나는 분위기를 느끼지 못했지만 이번 월드컵과 한국의 16강 진출을 계기로 국민이 하나된 마음으로 다시 뭉치게 됐다"면서 "정치 지도자들은 이런 국민 일반의 정서를 잘 읽고 분출된 국민의 강한 에너지를 국력으로 한데 모아 산적한 국내외 현안을 풀어나가는데 노력해야할 것"이라고 지적했다. 그는 "정치, 경제, 사회 전반에서도 월드컵을 통해 하나된 국력을 개개인의 이익을 위해서가 아니라 국민과 함께 하며 발전적으로 이끌어 나가야하는 모습이 필요하다"며 "그렇지 않을 경우 월드컵 이후 오히려 정신적 허탈감 마저 느낄 수 있는 점도 유의해야 한다"고 덧붙였다. (서울=연합뉴스) 고일환 기자 koman@yna.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