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 사회엔 아직도 여성을 기피하는 분위기가 있습니다.마주 대할 땐 젠틀하지만 돌아가선 "이 프로젝트에 여자는 넣지 말라"고 요구하는 남성도 있죠.이런 장벽을 깨는 건 실력 뿐입니다.내 경우엔 회사가 나를 믿어줬고 결정적인 순간에 업무 능력이 알려지면서 상황을 바꿀 수 있었습니다." 이숙영 LG CNS 상무(사업지원본부 기술연구부문)는 컴퓨터 프로그램을 각 기업의 실정에 맞게 적용하는 시스템통합(SI)업계의 유일한 여성 임원으로 널리 알려져 있다. 지난 84년 입문한 뒤 18년째 프로그램 개발과 구축 등 야전 현장을 지켜온 터라 그의 입지는 더욱 돋보인다. 대학(고려대 수학과)졸업 후 그는 국내 한 대기업에 대졸 여사원 공채 1기로 입사,전산실에 배치됐다. 경영진은 여성인재를 육성하고자 했지만 실무진까지 그런 생각을 공유한 것은 아니어서 도무지 일 다운 일이 주어지지 않았다. 오래간만에 할당된 일은 모두들 기피하던 "구매관리 시스템"제작. 배경을 몰랐던 그는 "신참에게 이런 중요한 일을 맡기다니"라고 생각하며 감사한 마음으로 열심히 일했고 좋은 결과가 나와 실력을 입증할 수 있었다. 하지만 승진 등 몇가지 사안에서 "뿌리깊은 성차별 의식"을 확인한 뒤 이직을 결심,89년 LG CNS(당시 STM)로 옮겼다. 새 직장에서는 국세청 국방부 신공항 등 공공사업을 주로 맡았다. 그런데 공무원들의 보수적인 성향은 대단했다. 상사를 통해 "여성은 원치 않는다"고 압력을 넣거나 중요한 얘기는 다른 쪽으로 돌려 하기도 했다. 하지만 꾸준히 최선을 다했고 이 과정에 공공연히 기피하던 적(?)을 친구(?)로 만들었다. 이 상무는 "중견 공무원인 이 분은 지금도 심심찮게 전화를 걸어 자문을 해온다"고 말한다. 프로그램 구축은 SI 업계의 최전선 업무다. 고객과 접점을 찾으면서 업무도 정확히 마치는 일은 상당한 스트레스. 이 때문에 한가지 일이 끝나면 후방(?)행을 원하는 사람도 많다. 하지만 그는 상무 승진(2001년)전까지,10여년간 30개 프로젝트에 매달려 일선을 지켰다. 그는 좋은 선배를 많이 만난 것이 직업인으로서 가장 큰 "복"이라고 말했다. 처음 일을 배울 때 "관행을 답습하지 말고 새롭게 시도해보라"고 주문하던 선배가 그런 사람. 현 직장에서 둘째를 갖고 심한 입덧으로 고생할 때 재택근무를 주선해 준 상사도 잊을 수 없다. 사내에 재택근무제가 있었지만 실제로 사용한 사람은 그가 처음이었다. 지금 이 상무에게 가장 든든한 우군(友軍)은 가족이다. 대학 때 미팅에서 만나 연애 결혼한 남편(KAIST 기계공학 박사.기업체 연구소 근무)은 아내가 바쁘면 서슴없이 주방 일을 거든다. 이 상무는 "중학 3학년.초등 5학년인 두 딸을 대신 키우고 지금도 집안 일을 도맡아주신 시어머니가 아니었으면 직장인으로서 이만큼 자리잡기는 어려웠을 것"이라고 덧붙였다. 글=조정애 기자 jcho@hankyung.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