첫 만남에 직업을 물어오면 그저 웃음으로 대답하는 여성들이 있다. "여자가 뭘 한다고?" 대뜸 돌아오는 반문이 뭔지 뻔히 보이니까. 웬만한 남자들도 하기 힘든 일을 하는 여성들의 얘기다. 육군에서 헬기를 조종하는 강선영 대위,목숨을 걸고 불길에 뛰어들어 화재를 진압하는 소방관 박양지씨,날렵한 발끝으로 악발이 스토커도 한방에 물리친다는 경호원 임미화씨,아저씨들의 걸쭉한 욕이 넘치는 건설 현장을 진두지휘하는 건축기사 이은정 씨가 그 주인공.꽃샘추위가 기승을 부리는 날 이들이 한자리에 모였다. #남자 사주로 태어났나봐요 강선영(논산 육군 항공학교 교관.이하 강)=대학 졸업을 앞두고 취업전문지에 실린 여군 장교 소개를 읽고 입대를 결심했어요. 소위,중위 시절 특전사에서 고공낙하 훈련을 받던 중 비행기를 타고 싶다는 막연한 생각이 들어 주특기를 조종으로 결정했죠. 임미화(경호전문회사 코세스 과장.이하 임)=태권도 국가 대표 시범단이었어요. 경력을 살릴 수 있는 일을 하고 싶어서 동료들과 함께 국내 처음으로 여성 경호단을 만들었습니다. 격투가 꺼려지지 않는 걸보면 남자 사주로 태어난 것 같아요 박양지(성동소방서 구의파출소 소방관.이하 박)=원래 우체국에서 근무했어요. 생각했던 것과는 사뭇 다른 공무원 생활에 싫증을 느끼고 있을 무렵 소방관 채용공고를 눈길을 끌었습니다. 여러 사람들을 위해 진정한 봉사를 하고 싶다는 맘에 지원했어요. 예상외로 부모님의 반대는 크지 않았어요. 이은정(대림산업 건축대리.이하 이)=대학에서 건축공학을 전공했어요. 동기들 중 90% 정도가 건축 설계쪽으로 지원했지만 나는 내 손으로 집을 직접 지어보고 싶은 마음에 시공쪽으로 지원했어요. #때로는 예쁜 것도 부담러워요 임=귀여운 이미지 때문에 처음 보는 사람들은 경호원이란 말을 듣고 깜짝 놀라요. 여성스럽다는 말이 나쁘진 않지만 일에는 오히려 마이너스가 될 때도 있습니다. 우락부락하게 생겼으면 더 믿고 일을 맡기지 않을까요?(웃음) 박=왠지 화재진압이라고 하면 무거운 방화복 속의 시커먼 얼굴을 떠올리게 되나 봐요. 그러다가 제 얼굴을 보면 진짜 소방관 맞냐고 묻기 일쑤죠.여자인데다가 여리게 보여서 그런가봐요. 이=화장하는 건 아예 포기했어요. 예쁘게 화장해봤자 건설 현장에서 일하다보면 먼지 투성이가 돼버리는 걸요. 화장 안하니까 오히려 어려보인데요. 박=매주 한두번은 검게 화장을 하는 셈이예요. 화재 진압 현장에 들어갔다오면 얼굴이 새까맣게 그을리니까요. #담당자 바꿔! 임=전화가 와서 받으면 "거기 담당자 없어요"라고 다그칠 때가 가장 황당해요. 나를 사무보조원 정도로 여기는 거예요. 당연히 경호업무는 남자나 하는 일이라는 인식 때문입니다. 하지만 그럴 땐 상당히 불쾌해요. 정말 인식의 전환이 필요해요. 강=군인들까지 "진짜로 헬기 조종해요?"라고 묻는 경우가 많아요. 군대 안에서 그런데 군 밖은 어떨지 짐작이 가죠? 헬기는 원래 기류 때문에 심하게 흔들리게 마련인데 심지어 "여자가 운전하니까 헬기가 흔들리는 것 아니냐"고 불평하는 사람도 있어요. 이=건설 현장에서 일하다 보니 아저씨들에게 말이 안 먹힐 때가 많죠.그렇지만 결국은 저를 따라오게 만들죠.칼날을 쥐고 흔들 필요는 없어요. 칼자루만 쥐고 있으면 돼요. 이 얘길 후배들에게도 꼭 하고 싶어요. #애 낳으니 복근(服筋,배근육)이 없어졌어요. 임=경호일은 체력이 기본이예요. 태권도 격투기 합기도 유도 단수만 합쳐도 두자리예요. 하지만 꾸준히 운동하는게 제일 중요해요. 일주일에 한번은 남자 경호원들과 대련을 하죠.여자라고해서 봐주는 건 전혀 없어요. 열심히 운동하는 수 밖에 없죠. 그런데 애를 낳고 나니까 복근(服筋)이 없어져서 고민이예요. 아무래도 본격적으로 몸만들기(?)에 들어가야겠어요. 강=땀 흘리는게 취미예요. 새벽 5시에 기상해서 인근 야산을 40분정도 올라요. 체력관리를 못하는 사람은 무능하다고 생각해요. 그래서 살찐 남자들은 별로 좋아하지 않아요. 박=물줄기가 워낙 세다보니 소방 호수를 드는게 사실 만만치 않아요. 그래서 열심히 헬스클럽에서 체력을 다져요. #"여자" 대신 "프로"라 불러다오. 박="여성 최초","여자소방관"이라 는 수식이 부담스러워요. 실력으로 인정받고 싶어요. 이=여성이라는 것 때문에 유명세를 타면 오히려 일하는데 견제가 들어와서 방해가 돼요. 진정한 "프로"로 불리고 싶어요. 강=신기하게 보면서 "어떻게 군대갔어요?"라고 묻는 사람이 너무 많아요. 이젠 그럴 땐 씩씩하게 되받아치죠."영장 나와서요"라고.여자라서 특별한 건 아무것도 없어요. 동기가 50명정도 있었는데 이제 반 정도는 옷을 벗었어요. 막연한 기대보단 전문인이 되겠다는 자세가 필요해요. 이=가끔 재건축 현장에서 시위를 하는 사람들과 맞닥들일 때가 있어요. 그런데 한번은 아주머니들이 현장 사무소에서 난동을 부리는 바람에 가건물이 무너질뻔 한 적이 있어요. 그때 꽤 다쳤죠.정말이지 가끔은 같은 여자지만 아줌마들이 너무 무서워요. 임=저는 그런 시위 현장을 진압하는데 갔죠.너무 막무가내니까 경호원들도 저지 못할 정도였어요. 저도 아줌마지만 아줌마 대하는 게 제일 힘들어요. #"마술"에 걸린 날요. 강=사실 남자들과 항상 같이 생활해야하는데 생리적인 문제가 아무래도 제일 크죠.군대 내에선 여자 화장실도 따로 없어요. 하지만 일단 주어진 환경에 적응하려고 노력하고 있어요. "마술"에 걸렸다는 걸 이유로 훈련을 방기하는 것은 상상도 할 수 없습니다. 여자 후배들에게도 말하고 있어요. "차별은 원하지 않는다. 단,유별(有別)한 것은 유별한 것이다" 임=생리 휴가라는 말이 딴 나라 얘기같아요. 힘들지만 일단은 극복하고 있습니다. 앞으로 점차 환경이 개선돼야죠. #일이냐 결혼이냐,그것이 문제로다 임=지금 남편과 대학 4학년때부터 사귀었어요. 도중에 남편이 일과 결혼 중에 선택을 하라고 해서 과감히(?) 일을 선택하겠다고 말하는 바람에 6개월 정도 헤어졌어요. 결국은 남편이 졌다며 경호일 하는 걸 인정해 줬어요. 지금은 가장 든든한 후원자죠. 아직까지 시집에는 비밀이예요. 사무만 보는 줄 아시거든요. 아마 현장에서 제가 진압하는 걸 알면,그것도 애 낳은지 한달 반만에 현장에 복귀한 걸 아시면 야단날 거예요. 박=남자 친구가 늘 몸조심하라고 그래요. 다른 소방관들은 아내한테나 듣는 말을 전 남자친구한테서 듣죠. 강=아직 미혼입니다. 물론 독신주의는 절대 아니랍니다(!). 이=안했어요. 남자들 소굴에서 살다보니까 남자들한테 특별한 관심이 안가요. 새벽에 집에서 나와 밤늦게 들어가니까 데이트할 시간도 없어요. 하지만 저도 독신은 아니예요. 글=김미리.류시훈 기자 miri@hankyung.com .............................................................. 강선영=36세.논산 육군 항공학교 교관.계급 대위.조종사 양성반 교육 담당.숙대 행정학과졸업.학사장교로 입대.특전사 시절 주특기를 조종으로 결정.녹색 정복이 잘 어울리는 그녀는 해질녘 노을이 헬기에 오버랩되는 광경을 이 세상에서 제일 사랑한다. 박양지=28세.대진대 철학과 졸업.우체국에 근무하다가 소방관 공채에 지원.현재 성동소방서 구의파출소 근무.서울에서 근무하는 최초이자 유일한 여성 소방관.여성부 공익광고 출연.화재 진압 소방관에 많은 여성들이 지원했으면 하는 게 바램이다. 이은정=29세.홍익대 건축공학과 졸업.대림산업 근무.아파트 건설 현장에서 작업을 진두지휘하고 있다. 별을 보고 출근해 별을 보고 돌아오는 고달픈 일상이지만 다 지어진 아파트를 보면 시름이 다 날아간다고 한다. 임미화=28세.경희대 체육학과 졸업.태권도 국가대표 시범단 출신.국내 최초의 여성 경호단 "블루버드" 창립.2년전 대학 동기와 결혼에 골인.애띤 미소가 귀여운 그녀에겐 20년동안 태권도로 단련된 체력이 가장 큰 보물이다. (가다다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