재입북해 북한 당국에 붙잡혔다가 극적으로 다시 탈북, 입국한 유태준(34)씨는 13일 오후 서울 중구 태평로 코리아나호텔에서 기자들과 만나 "(대한민국 법을 어긴데 대해)처벌을 각오하고 있다"며 "남한땅에 있다는 것만으로도 기쁘다"고 밝혔다. 그는 남북분단이후 북한을 탈출, 남한으로 입국한뒤 다시 재입북, 재탈출에 성공, 입국한 첫 탈북자로 기록됐다. 다음은 유씨와의 일문일답. --재입북에서 재탈북까지의 과정은. ▲2000년 6월9일 대구를 출발해 15일 오후 중국 지린(吉林)성 송전툰에서 조선족 최모씨를 만났다. 최씨는 99년 아들을 데려올 때 도와줘 이 사람을 통해 아내를데려올 계획이었다. 함경북도 무산에 처가 와있다고 해서 16일 두만강을 건너갔으나 처는 거기에 없어 25일 오전 7시 함흥의 처갓집에 가서 장모를 만났다. 장모는 국가안전보위부에 신고하겠다고 해 기차를 타고 무산으로 돌아왔다. 무산에서 두만강 도강을 기다리다가 30일 보위부원에게 잡혔다. 무산 보위부 구류장에서 청진 도(道)보위부로 이송되는 과정에서 수쇄(수갑)를 풀고 차에서 뛰어내리기도 했다. 여기서다시 평양 보위부로 이송됐다. 7월1일부터 10월7일까지 평양 보위부 감옥에서 생활하다 2001년 1월15일 재판을받고 32년형을 선고 받았다. 2001년 3월1일 청진 국가보위부 정치범 교화소에 수감됐다가 5월7일 나를 대남연락소 초대소로 끌려갔다. 조평통 안명국 참사라는 사람이나에게 22쪽짜리 원고를 주면서 기자회견을 준비시켰다. 5월30일까지 준비를 마치고보위부 감옥에서 다시 생활하다 8월4일 다시 끌려갔다. 기자회견 장소에 기자는 없었고 모두 연락소 공작원이었으며 인민문화궁전에서 기자회견을 할때는 촬영도 했다. 작년 11월 10일 보위부 감옥에서 탈출해 순천역에서 기차를 타고 량강도 혜산시까지 와서 11월30일 압록강을 건너 국경을 넘었다. --중국에서의 생활은. ▲처음 한 교회에 찾아가 도움을 요청했지만 교회 관계자는 탈북자라 도와줄 수없다고 거절을 하면서 중국 공안당국에 신고까지 했다. 12월 3일 중국 공안당국에잡혔고 이후 대한민국 국민임을 주장해 지난 9일 강제추방된 것이다. --서울에 들어와서 조사는. ▲인천국제 공항에서 자진신고를 했고 정부기관에서 조사를 받았다. --방북기간에 남북 정상회담이 있었다. 주민들의 반응은. ▲정상회담이 끝난 후 남한에 대한 얘기가 많았다. 북한 주민들은 담담한 반응이었다. 북한주민들은 김대중 대통령이 김정일을 동격으로 만나는 것이라고 했다.여하튼 북한 주민들은 그리 달가워 하지 않는 것 같았다. 하지만 남한에 대한 동경은 대단했다. --북한에서의 가혹행위는. ▲(손바닥의 상처를 가리키며)철뭉치를 맞아서 찢어진 자국이다. 많이 맞았고 얼굴, 온몸이 상처투성이다. 특히 귀고막이 터져 고름이 지금도 나온다. --중국공안에서의 생활은. ▲중국공안 당국은 2000년 6월9일 심양에 내렸던 나의 출입국 기록을 가지고 있어 확인했던 것 같다. 특히 중국 감옥은 먹을 것도 잘 주고 오히려 살이 찔 정도였다. --북한에서의 감옥생활은. ▲운동은 전혀 할 수 없었다. 근력을 키워 도주할 수 있기 때문이다. 식사는 옥수수와 콩 삶은 것을 준다. 콩은 보통 60알, 옥수수는 50알 정도이다. 하루에 세끼정도 주는데 정말 형편없는 상황이다. --처(아내)는 만났나. ▲두번째 기자회견 때 인민문화궁전에서 봤다. 하지만 긴장을 해서 한마디 말도 건네지 못했다. --정부에 사전신고를 하지 않았다. 처벌이 있을 수도 있는데. ▲대한민국 국민으로서 법 위반을 반성한다. 하지만 이제 대한민국의 소중함을 알게됐다. 이전에는 남한 생활에 잘 적응못했는데 이제는 잘 생활하겠다. 그리고 처벌도 각오하고 있다. 하지만 남한에 있다는 것 만으로도 얼마나 기쁜지 모른다. --다시 부인을 만나기 위해 북한에 들어갈 생각이 있나. ▲지난 2000년 6월 들어갈 때만 해도 처를 사랑했다. 하지만 장모가 나를 신고하는 순간 잘못 생각했구나 하는 생각이 들었다. 나도 아들이 있다. 이제는 그런일이 없을 것이다. (서울=연합뉴스) 장용훈기자 jyh@yonhapnews.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