민주화바람이 산업현장을 휩쓸던 1980년대말. LG전자도 이같은 격동의 소용돌이 속에서 자유롭지 못했다. 지난 87년과 89년 창원과 구미 공장을 중심으로 두차례에 걸쳐 일어난 대규모 노사분규는 6천억원의 매출 손실로 이어졌다. 수백대의 TV 브라운관을 불태우며 농성하던 창원 공장의 ''전쟁터'' 같은 모습은 당시 미국 시사주간지 뉴스위크의 표지를 장식하기도 했다. 회사 경영도 낭떠러지 끝으로 떨어졌다. 각 지역 노조 지부장과 대의원 선거때마다 제1의 공약사항이 ''파업''이었던 이 혼돈의 시기에 장석춘 현 노조위원장(45)은 언제나 투쟁의 선봉에 서 있었다. 현장근로자 차별 철폐와 임금인상을 부르짖으며 면도칼로 자신의 머리를 직접 삭발할 만큼 타협불가능한 ''초강성'' 노조원으로 통했다. 하지만 그에게도 노동운동에 대한 생각을 송두리째 바꿔놓을 만한 사건이 발생했다. 두차례에 걸친 파업으로 회사가 존폐의 위기를 겪고 난 90년초. 평소 안면이 있던 독일인 바이어가 그에게 노사마찰을 겪는 LG전자를 믿을 수 없어 이제부터는 경쟁사와 거래를 시작하겠다고 통보해 온 것. 당시 구미공장 지부장으로 활동하던 그는 ''이래서는 안된다''는 생각에 사업장내의 노조 깃발과 선동성 플래카드를 앞장서 철거했다. 이로 인해 하루 아침에 ''변절자''라는 비난을 받게 됐지만 여기에 굴하지 않고 "회사가 있어야 노조도 있다"는 말로 노조원들을 설득시켰다. 이때부터 회사측도 노조를 적극적으로 포용하기 시작했다. 노사화합을 최우선 경영과제로 삼고 경영정보를 가감없이 근로자에게 공개했다. "노사문제에 대한 인식이 부족한 임원은 등용하지 않겠다"라는 구자홍 부회장의 약속은 노사대립의 고리를 끊는 결정적인 계기가 됐다. LG전자는 지난 93년부터 노사관계라는 표현 대신 노경관계라는 단어를 사용하고 있다. 이러한 노경관계의 변화는 13년 무분규 사업장과 5년 연속 임단협 무교섭 타결로 나타나고 있다. 장 위원장은 "우리 노조가 투쟁성을 잃었다고 여기저기서 비판의 목소리가 많았지만 지금은 그들이 한결같이 우리 뒤를 따라오고 있다"며 "강한 노조는 투쟁을 잘하는 노조가 아니라 교섭을 잘하는 노조"라고 강조했다. 이정호 기자 dolph@hankyung.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