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울가정법원의 A판사는 이혼소송 심리를 위해 최근 한국통신에 관련자들의 통화 내용을 요청했다가 거부당하고는 난감해 하고 있다. 부인이 주장하는 남편의 불륜행각을 가려내는데는 남편과 내연녀간의 통화 내용을 파악하는게 필수적이지만 한국통신이 밝힐 수 없다고 했기 때문이다. A판사는 핵심 증거자료를 확보하지 못한 상태에서 어떤 판결을 내려야 할지 고민을 거듭하고 있다. 서울가정법원의 B재판부는 국세청의 '벽'에 부딪친 경우.이혼과 함께 재산분할 소송을 제기한 부인이 "남편에게는 시동생 앞으로 빼돌려진 수십억원대의 부동산이 있다"며 "이를 재산분할 대상에 포함시켜 달라"고 주장해 국세청에 부동산 소재지 등 관련 자료를 요청했지만 받지 못했다. 11일 법원에 따르면 정확한 심리를 위해 한통 등 통신사업자나 국세청 등에 자료를 요구해도 거부당하는 사례가 많아 법률보완 등 대책 마련이 시급하다는 지적이 일고 있다. 재판부가 실체적 진실을 모를 경우 공판이 불필요하게 길어지는 것은 물론 자칫 증거부족에 따른 '잘못된 판결'을 낳을 수도 있기 때문이다. ◇ 관련 기관 왜 거절하나 =일부 기관이 법원의 자료 공개를 거부하면서 내세우는 이유는 '인권보호'다. 한통 사업지원부 관계자는 "통화내용을 제공할 경우 소송 당사자의 통신자유가 침해될 소지가 있다"며 "현행 전기통신사업법에는 검찰 등 수사기관에만 제공할 수 있도록 돼 있을 뿐 법원에 대해서는 규정이 없다"고 말했다. 국세청도 국세 기본법에 비밀유지 규정이 있어 부동산 관련자료를 제공할 수 없다는 입장이다. 특히 지난해 초 전기통신사업법에 '통신사업자는 정보를 부당하게 사용하거나 제3자에게 제공해서는 안된다'는 조항이 삽입되고 정보통신부가 '통신자유제공 업무처리지침'을 마련해 '법원에 정보제공 불가'방침을 세운 뒤부터 법원의 정보접근은 한층 더 어려워진 상태다. 서울가정법원의 한 판사는 "정통부 '지침'이 마련된 이후 통신회사들은 법원의 통화내용 조회를 대부분 거부하고 있는 실정"이라고 설명했다. ◇ 공정한 재판을 막는 '인권보호' =하지만 법원 관계자들은 "필요한 모든 증거를 확보하고 증인 등 관련자들이 공판과정에 참여토록 할 수 있어야만 '억울한 약자'를 보호할 수 있는 재판이 가능하다"고 반박하고 있다. 심지어 자료제공 요구가 묵살되는 상황에서는 사법부의 존재 의미가 퇴색된다는 주장도 나오고 있다. 이에 따라 대법원은 재판에 필요한 자료 요청을 관계 기관들이 거부할 수 없도록 법률을 보완할 방침인 것으로 알려졌다. 그러나 법안이 국회에 상정된다 해도 통과되는 데는 상당한 진통이 따를 전망이다. 해인법률사무소 배금자 변호사는 "미국 등 선진국의 경우 법원의 정보제공 요청을 거부하면 '법정 모독죄'가 적용돼 엄하게 처벌받는다"며 "개인의 사생활도 보호하면서 사법부의 권위도 지킬 수 있는 방향으로 제도가 보완돼야 할 것"이라고 말했다. 이상열 기자 mustafa@hankyung.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