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대담 = 양승득 도쿄특파원 ] "기업의 흥망과 생사는 궁극적으로 기업가의 사람됨에 달려 있습니다. 이윤추구에 목표를 두는 것이 당연하지만 그래도 바른 길을 가겠다는 신념과 철학을 잊어서는 안됩니다" 혼돈의 시대에 이나모리 가즈오(稻盛和夫) 교세라 명예회장(69)이 들려주는 답은 분명했다. 가치관이 흔들리고 물질만능 풍조가 판을 치는 세상이 됐어도 기업가는 땀과 노력으로 올바르게 돈을 벌어야 한다고 그는 강조했다. "기업가는 경마장에 나온 말과 같아 자신을 믿고 마권(주식)을 사준 사람(주주)들을 위해 죽어라 하고 달려야 한다"고 말한 그는 "젊고 유능한 기업가일수록 쉽게 돈을 벌겠다는 한탕주의를 경계해야 한다"고 주장했다. 초가을 햇살이 눈부신 지난 주말 교토의 교세라 본사에서 기자를 맞아준 그는 아침 일찍부터 먼길을 오느라 수고했다며 반가운 표정으로 손을 내밀었다. 악수 문화가 없는 일본사회에서 첫 대면의 낯선 기자에게 먼저 손을 내밀어준 저명인사는 그가 처음이다. 이나모리 명예회장은 한국 농업중흥의 아버지 고(故) 우장춘 박사의 넷째 사위이기도 하다. --------------------------------------------------------------- -기술자 출신의 20대 창업가에서 성공한 기업가에 이르기까지 다양한 삶을 살아 오셨습니다. 기업을 세우고 키우는 과정에서 꼭 지키려 했던 신념이나 철학을 들려주십시오. "기업 활동은 기본적으로 이윤추구에 목적이 있습니다. 27세의 젊은 나이 때부터 기업가의 길을 걸은 나도 이같은 의식을 가졌던 것은 마찬가지입니다. 하지만 사람은 누구나 올바르고 정확한 길을 가야 한다고 믿어 왔습니다. 돈을 벌되 이마에 땀흘려 가며 정당하게 벌지 않으면 안된다는 것이 나의 믿음입니다. 회사를 차렸을 때 나는 내 자신이 기술자로서의 능력은 뛰어날지 몰라도 경영은 완전 초보라고 생각했습니다. 그래서 정도를 걷지 않으면 사업은 오래가지 못한다고 확신했습니다" < 28명의 친지.동료와 함께 자본금 3백만엔의 교토세라믹(교세라의 전신)을 세웠을 때 그는 돈이 없어 당시만 해도 파격적이라고 할 기술출자 형태로 참가했다. 7년 후 사장으로 추대된 그는 종업원들의 물심양면에서의 행복 추구를 목표로 내걸었고 인류 사회의 발전에 기여한다는 이념을 제시했다. 이같은 사고방식은 교세라가 사시를 '경천애인(敬天愛人)'으로 정한 것과도 무관치 않은 것으로 보인다> -기업 경영에서 가장 중요한 요소를 하나만 꼽는다면 무엇이겠습니까. "기업가의 그릇입니다. (잠시 눈을 감고 생각한 후) 기업가가 어떤 주관을 갖고 어떻게 꾸려 나가느냐에 따라 기업의 생명과 진로는 크게 달라집니다. 올바른 생각을 갖고 있지 못한 기업가는 아무래도 판단이 편협할 수 밖에 없습니다. 기업을 훌륭하게 키워 내려면 기업가는 바로 된 생각과 철학, 그리고 신념을 가지지 않으면 안됩니다" -벤처기업인들을 대상으로 '철학없는 사람은 물러 가라'고 호되게 비판한 적이 있으시지요. "IT(정보기술) 버블이 생긴 원인중 하나는 벤처기업인들의 자세에 있습니다. 훌륭한 기업인도 많지만 뚜렷한 주관, 철학도 없이 간단한 아이디어나 기술만으로 큰 돈을 벌려고 덤벼든 사람도 적지 않았습니다. 경영은 숭고한 마음자세로 하는 것입니다. 균형잡힌 '전인격'이 요구되는 일이죠. 이는 벤처기업인이 갖춰야 할 자질인 동시에 책임이자 의무입니다. 하나의 아이디어를 사업에 옮기기까지는 많은 설비와 시간, 노력을 들여야 하는데 벤처기업인들 중에는 이런 것을 무시하고 일확천금만을 꿈꾼 사람이 많았던 것이 사실입니다. 어렵게 모은 돈이 결국 사업발전의 토대가 되지만 주식 상장을 통해 거금을 손쉽게 쥐게 되면 모든게 만만하게 보입니다. 이것이 현재 벤처기업들이 흔들리게 된 큰 요인이지요" < 일본 벤처기업의 선구자로 평가받는 그는 자신의 경영이념을 연구하는 모임 '세이와주쿠(盛和塾)'를 통해 많은 벤처기업인을 길러 냈고 여기에서도 '인격을 닦고 자기를 규율하라'는 가르침을 빼놓지 않고 있다. 손정의 소프트뱅크 사장과 시게다 야쓰미쓰 히카리통신 사장 등도 세이와주쿠 출신이지만 그는 이들의 마음가짐과 태도가 예전에 비해 많이 달라졌다고 우려하곤 했다> -기업가를 경주마에 비유하는 특이한 사고를 갖고 계신데 지금도 변함이 없습니까. "그렇습니다. 주식투자자란 경주마가 레이스에 잘 달려 이겨 주기를 바라고 마권을 사는 사람과 같습니다. 따라서 기업가와 기업은 마권을 산 사람을 위해 필사의 힘을 다해 뛰어야 하는 경주마나 마찬가지지요. 경주마가 부진한 성적을 내면 마권을 산 사람들이 손해를 보듯 기업가가 의무를 소홀히 한다면 수많은 투자자들이 손실을 입을 수 밖에 없습니다" -금전철학을 소개해 주십시오. "돈이란 것은 기본적인 생활유지에꼭 필요하지만 지나친 돈은 인간을 타락시킵니다. 물건을 함부로 쓰면 안되듯 돈 역시 올바른 사용법을 배우지 않으면 안됩니다. 중요한 것은 무엇보다 남을 위해 쓰는 것을 배우는 일입니다. 나는 재물(돈)을 쓰는 데도 올바른 길이 있다는 것을 좌우명으로 삼고 있습니다" < 교세라가 특수 세라믹부품의 파이어니어업체로 각광받았던 지난 71년 회사를 오사카증시에 상장시킬 때 그는 자신이 갖고 있던 주식을 단 한주도 팔지 않고 신주발행만으로 자금을 조달했다. 기업을 잘 키웠다고 창업자가 상장을 통해 이익을 챙기는 것은 옳지 못하다는 신념에서였다. 그러나 학술진흥과 문화사업 지원에는 돈을 아끼지 않아 지난 84년 주식과 현금 등 사재 2백억엔을 출연해 이나모리재단을 설립, 교토상을 제정했다. 98년에는 비디오 아티스트 백남준씨가 아시아인중 최초로 교토상 수상자로 선정되기도 했다 > -불가에서 수행할 당시에도 돈에 얽힌 일화를 갖고 있는 것으로 알고 있습니다. "수행 과정의 하나로 탁발을 나섰다가 절로 돌아갈 때의 일이었습니다. 60대 후반의 나이로 탁발을 한다는 것은 육체적으로도 매우 고된 일이었습니다. 저녁 때가 다 되니 다리가 후들거리고 짚신을 신은 발은 까져서 피가 흘렀습니다. 너무 애처로워 보였던지 길가에서 낙엽을 청소하던 할머니 한분이 1백엔짜리 동전 한닢을 건네 왔습니다. '일면식도 없고 아무 관련이 없는 할머니가 내게 은혜를 베풀다니...' 순수한 마음으로 남을 도우려 하는 것이야말로 신의 사랑일 것이라고 나는 느꼈습니다. 나는 남을 위해 최선을 다하는 것이야말로 사람이 할 수 있는 최고의 행위라고 확신하게 됐습니다" -기업경영과 불교는 상반된 것처럼 보이는데 기업가가 불교에 심취했다는 것이 특이한 것 같습니다. "아무런 관계도 없는 것 같지만 불교와 기업 경영에는 상통하는 점이 한 두가지가 아닙니다. 비즈니스활동이 자본주의의 요체이긴 하지만 남으로부터 이익을 강제로 뺏으라는 것이 아닙니다. 열심히 일하고 아껴 쓰면서 재물을 불리라는 것이지요. 이는 불교의 가르침 정진(精進)과 같습니다. 보시(布市) 역시 마찬가지입니다. 남을 도와주는 이타주의 아닙니까. 계율을 지키라는 가르침과 인내도 기업 경영에 그대로 들어맞습니다. 기업가는 올바른 생각과 철학을 몸에 지니지 않으면 안되고 불황이 닥쳤다고 쉽게 주저 앉아서도 안됩니다. 지금 말한 계율은 모두 부처의 가르침을 담은 육바라밀(六波羅密)이라는 불경에 나오는 것들입니다" -교세라의 독특한 회계지침을 담은 실학(實學)이 2년전 베스트 셀러가 됐던 배경은 어디에 있다고 보십니까. "기업을 경영하는 것은 돈을 다루는 일입니다. 따라서 회계의 중요성은 아무리 강조해도 지나치지 않을 것입니다. 투명하고 정직해야 합니다. 일본 경제의 거품이 꺼지고 수많은 기업이 무너지면서 교세라라는 기업의 강점이 더 주목을 받게 된 것 같습니다" -한국의 젊은 경영자들에게 조언을 한가지 해주십시오. "한국 경제는 지금까지 대그룹 의존도가 너무 높았습니다. 한국 경제의 도약을 위해서는 젊은 기업가(起業家)가 더 많이 배출되야 합니다. 일본과 마찬가지로 어른 앞에 너무 나서는 것을 꺼리는 유교적 영향도 있는 것 같지만 그래도 사업은 다릅니다. 21세기 한국경제는 젊고 유능한 기업가들이 이끌고 가야 합니다" < yangsd@hankyung.com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