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꼭 죽거나, 신분이 노출돼야만 보상하나" 19일 오전 인천시 중구 용유도에서는 지난 50∼60년대 사선(死線)을 넘나든 북파(北派) 공작원 30명이 모여 '명예회복 및 보상'에 미온적인 정부의 태도를 집중성토했다. 한때는 북한군의 간담을 서늘케 했지만, 이제는 60대 촌로에 귀도 멀고, 온몸에 상처뿐인 노병(老兵)들이다. '깜빡이 부대', '철조망 부대'로도 불리는 이들 북파공작원들은 7.4 남북공동성명전인 지난 72년까지 최고 200여차례나 북한을 넘나들며, 조국을 위해 싸웠다. 하지만 생존자 중 어느 누구도 단 한 차례의 훈장을 받아 본 대원은 없다. 지난 68년 6월 23일 새벽 1시30분. 북한 해군 상륙정(LCU)과 선조원 납치공작 임무를 띈 U.D.U(Under Demolition Unit)의 채철석(6기)대원 등 북파 공작원 15명은 3개 팀으로 나뉘어 평안남도 해주옆 부포항에 도착했다. 예상치 못했던 해상 장애물을 1시간동안 처리한 뒤 침투했지만 북한군에 노출돼, 조명탄을 터뜨리며 무차별 공격을 가해오는 적과 쫓기는 싸움을 해야했다. 바주카포 12발, 기관총 1천250발, 자동소총 400발, 자살용 권총 실탄 21발 등을 모두 소모하며 벌인 40여분간의 치열한 교전 끝에 탈출에 성공했다. 이 과정서 1개조(組) 대원 6명이 전사했고 채씨는 귀를 다쳤다. 채씨는 '눈을 감고도 적지를 찾아갈 정도로 고도의 훈련을 받은 대원들의 희생이 많았던 이유는, '해상 장애물이 없다'는 61년 귀순한 북한 해군의 말만 믿고 침투시킨 지휘관의 정보부재 탓'이라고 지적했다. 전사한 대원들은 당시 국가기밀상 무장공비 소탕작전 중 전사한 것으로 처리돼, 훈장까지 수여됐다. 이렇듯 50년대∼71년까지 국가를 위해 장렬히 전사한 U.D.U출신의 북파 공작원은 모두 53명(실종자 11명 포함). 지난 61년이후 전사자에 대해서는 모두 보상처리가 됐지만 생존자에 대한 보상은 전혀 이뤄지질 않았다. 이들은 "5.18 광주민주화 운동에 대해서는 보상법이 시행되고, 간첩선을 신고하면 포상금까지 주면서, 정작 국가를 위해 사선을 넘나들며 젊음을 희생한 공작원들을 차별할 수 있냐"며 "살아있다는게 이렇게 죄가 될 줄은 몰랐다"고 하소연했다. 이날 모인 전직 북파 공작원들은 "생존자에 대한 명예회복 및 보상문제가 해결될 때까지 대정부 투쟁을 벌일 것"을 다짐했다. (인천=연합뉴스) 김명균기자 kmg@yna.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