공직 입문자들에게 1급은 꿈의 고위직이다. 장.차관의 경우 흔히 정치적 고려가 임명 배경이 되는 점을 감안하면 1급이야말로 제 실력만으로 올라갈수 있는 정상의 직급일 터이기 때문이다. 그런만큼 행정고시도 안거친 말단 9급, 그것도 고졸학력으로 출발한 여성이 1급직에 오른다는건 거의 기적 같은 일이다. 김애량(52) 서울시 여성정책관. 그는 바로 그러한 기적을 일군 사람이다. 68년 행정9급 동사무소 여직원으로 서울시에 첫발을 디딘지 33년만인 지난 1월, 1급인 여성정책관직에 당당히 올랐다. 서울시 1급중에서는 유일한 여성이다. 소녀시절, 그의 캐릭터는 우울하고 내성적이었다. 서울에서 태어나 당시 명문인 이화여고를 다녔지만 가정은 빈한했고 희망도 보이질 않는 것 같았다. 고3때인 67년에는 아버지가 갑자기 병까지 앓으셨다. 4남2녀중 셋째였던 그는 끝내 대학생이 되겠다는 꿈을 접어야만 했다. 일자리를 알아보던중 친구로부터 서울시 9급 행정직 시험이 있다는 걸 알았다. 별다른 준비도 없이 공채시험에 응한게 바로 오늘의 그를 있게 한 출발점이 됐다. 고교를 졸업하던 해인 68년 6월, 집 근처인 성북구 동소문동 동사무소에 첫 발령을 받았다. 19살이던 그녀가 9급 지방서기보의 보직으로 출근하자 대부분 남자인 직원들은 별로 반겨주는 눈치가 아니었다. 그때만 해도 그 이유를 알지 못했다. 몇 달을 그렇게 보냈다. 그런 가운데서도 대학에 대한 미련을 버리지 못해 성균관대 야간학부에 시험을 봐뒀는데 합격통지서가 날아왔다. 그러나 월급에서 집에 보태야 할 쌀 한 가마니 값을 빼고난 돈으로는 도저히 학비를 댈 자신이 없어 포기했다. "입학취소통지서를 받아들곤 남몰래 눈물도 많이 흘렸어요" 그러던 어느날. 대학생이 된 고교 동창생이 주민등록증을 발급받으려 동사무소를 찾았다. 그는 자신도 모르게 등을 홱 돌렸다. 북청색 공무원 제복을 입은 자신이 촌스럽고 초라하게 생각되어서였다. 시간이 빨리 흘러 동창생이 나가기만을 기다렸다. 그러다 문득 등을 돌리고 있는 자신이 더 부끄럽다는 생각이 뇌리를 스쳤다. 대학에 못간게 죄도 아닌데 부끄러워 하지 말자고 마음을 다잡았다. 돌아서서 친구와 인사를 나누고나니 한결 마음이 편해지는걸 느꼈다. 이를 계기로 그는 근무자세를 바꾸었다. 당당하고 적극적으로 현실에 맞서가기로 마음먹었다. 남자 직원들이 자신 때문에 숙직이 빨리 돌아오게 된다며 불평을 하는 소리를 듣곤 숙직 대신 모든 휴일 일직을 도맡아 해주었다. 그후로부턴 남자 직원들도 그를 여성이 아닌 동료로 대했다. 당시 그녀의 주된 업무는 주민등록증을 발급하고 그 내용을 서류에 옮겨 적어 본적지에 보내는 일. 동사무소에서 가장 귀찮고 힘든 일이었다. "먹지를 깔고 꾹꾹 눌러 서류를 쓰다보면 팔이 떨어질듯 아프기도 했지요" 그러나 그는 '이게 내겐 가장 소중한 일이다'라는 생각으로 성실히,그리고 열심히 일했다. 그해 말 구청에서는 주민등록법 이행실태에 대한 감사가 있었다. 성북구 내에서는 동소문동이 1등을 차지했다. 이를 계기로 구청 총무과 동정계로 발탁됐다. 말단 동직원을 구청으로 전보하는 일은 당시로선 흔치 않았다. 구청 동정계에서도 밤을 새워서라도 맡은 일을 해내는 모습이 눈에 띄어 이번에는 회계파트로 스카우트 됐다. 힘들었지만 이 무렵이 그에게는 자신감을 회복하고 희망을 일군 시기였다. 몇 차례의 승진시험을 통과해 73년에는 7급이 됐고 곧 서울시청의 부녀과로 발령받았다. 그의 공직인생중 20여년 이상을 차지하게 된 여성 및 복지분야와의 인연은 이렇게 시작됐다. 이를 계기로 세상에는 자신보다 더 어려운 사람들이 많다는 것을 절실히 깨닫게 됐다. 사명감과 함께 그만큼 보람도 느꼈다. 77년 6급으로 승진, 시간여유가 조금 있는 공무원교육원으로 발령이 나자 서울시립대 회계학과 야간과정에 입학했다. "그때만 해도 5급승진도 어려울 것으로 생각했어요. 대학을 나와 공인회계사시험이나 한번 볼까 하는 생각이었거든요" 그러나 그는 얼마 뒤 다시 부녀과로 발령받는 바람에 회계사 시험준비를 포기해야 했다. 뒤늦게 시작한 공부는 계속해 90년에는 시립대 도시행정대학원을 졸업, 석사모를 썼다. 이후 서울시에서 감사담당관 가정복지과장 가정복지국장 등을 거쳐 98년 8월에는 서대문구 부구청장(3급)에 임명됐다. 전국 자치구중 첫 여성 부구청장의 탄생이었다. 부구청장 시절, 그는 사무실 문을 항상 열어 놓는 것으로 유명했다. 민원인이 부담없이 찾아와 이야기를 나눌 수 있도록 한다는 취지였다. 부구청장 임기를 마치곤 미국유학을 구상했다. "2급으로 승진하려면 자기계발이 더 필요하다고 생각했죠" 그가 35세때 결혼을 한 남편(여주대 교수)도 때마침 해외에 갈 기회가생겼었다. 그러나 출국날짜까지 잡았을 무렵 고건 시장으로부터 여성정책관직을 제안받았다. 무척 망설여졌다. 하지만 공직생활의 대부분을 차지한 여성 복지분야에서 소신을 펼칠 수 있는 기회라 생각돼 결국 이 제안을 받아들였다. 그리고 올 1월의 인사에서는 마침내 1급으로 승진했다. 그는 자신의 성공배경을 묻는 질문에 "매사에 성실했기 때문이었던 것 같다"고 답한다. 학연 지연 혈연이 성공의 필수조건이라는 사회통념에 결코 동의 할 수 없다는 것이다. "어제는 히스토리(history), 내일은 미스테리(mystery), 현재(present)는 선물(present)이라는 말이 있어요. 저는 언제나 현재에만 충실할래요" 그의 이런 충실한 오늘이 앞으로 또 어떤 요술 같은 내일을 만들어 낼지는 이제 지켜볼 일이다. 주용석 기자 hohoboy@hankyung.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