중산층이 떠나고 있다.

삶이 안정된 나라로 둥지를 옮기는 것이다.

지난 98년 IMF(국제통화기금) 사태이후 급증했던 해외이민이 한동안 주춤하더니 올들어 다시 급증세를 보이고 있다.

잇단 기업부도와 퇴출 실직 등으로 경제적 어려움이 가중된 데다 사회적 불안이 가세된 탓이다.

특히 ''먹고 살만한'' 사람들이 가족을 데리고 떠나는 경우가 많아 우리 사회가 그만큼 살기 어려워졌음을 반증하고 있다.

22일 외교통상부에 따르면 올들어 지난 9월말까지 해외로 이주한 사람은 모두 1만1천1백77명에 달한다.

이같은 추세라면 올 한햇동안의 이민자는 1만5천명에 이를 것으로 예상된다.

이는 IMF체제로 인한 경제붕괴로 해외이민이 러시를 이뤘던 98년의 이민자수(1만3천9백74명)를 넘어서는 수치다.

97년이나 99년보다 2천3백∼2천5백명 많은 규모다.

최근의 이민은 캐나다와 뉴질랜드 등 사회적으로 안정되고 자녀 교육과 노후에 대한 불안이 적은 나라로 집중되고 있다.

일정 규모 이상의 재산과 학력 등 까다로운 조건을 요구하지만 이민 수요는 계속 늘어나고 있다.

은퇴하거나 실직 해도 마땅히 할 일이 없는 데다 자녀 교육이 힘들며 시끄럽고 불확실한 사회적 환경에 염증을 느껴 떠나기로 했다는 게 이민을 결심한 사람들의 한결같은 얘기다.

올들어 9월까지 캐나다로 이주한 사람은 모두 6천9백80명.

이미 작년 한햇동안의 이민자수(6천7백83명)를 넘었다.

이 추세라면 올해 캐나다 이민자는 9천3백명에 달할 전망이다.

또 뉴질랜드로 떠난 사람은 2백36명으로 연말까지는 작년(1백74명)의 2배에 달할 것으로 추정된다.

미국으로는 3천6백99명,호주로는 2백46명이 떠났다.

미국과 호주 이민은 작년보다 약간 줄어들었다.

이주 사유는 취업이주가 6천1백33명,사업이주가 1천8백19명으로 전체의 71.2%를 차지하고 있다.

대부분의 이주자가 ''살길''을 찾아 떠나고 있다는 말이다.

친지 초청이나 국제결혼이 주된 이민 이유였던 과거와는 판이한 양상이다.

캐나다나 뉴질랜드 호주 등으로 이민가는 사람들은 대부분 중산층이상의 생활을 누리던 사람들이다.

캐나다의 경우 독립이민자에게는 대졸이상의 학력과 4년이상의 해당분야 근무경력을 요구한다.

투자이민을 가려면 8억원이상의 자산이 있어야 한다.

더욱이 캐나다 정부는 자신의 힘으로 재산을 형성했다는 증빙자료까지 요구하고 있다.

사정이 이같은 데도 캐나다 이민 신청은 줄을 서 있다.

이민설명회 때마다 성황을 이룬다.

캐나다 이민 상담을 하는 세촌해외이주컨설팅의 강효정 실장은 "캐나다 이민을 생각하는 사람들의 경우 대부분 이민 조건은 문제가 안된다"며 "대체로 국내에 있는 재산을 정리해 편안하게 살려고 하거나 자녀들의 교육 때문에 상담을 해 온다"고 말했다.

요즘 들어서는 의사들의 이민 상담이 많다고 한다.

의약분업으로 수입이 크게 줄어들 것으로 예상되자 차제에 해외에서 다시 공부하거나 다른 나라에서 의료업을 하겠다는 것이다.

삼성이주공사의 홍혜영 차장은 "의사들의 전화상담이 하루에 4~5건씩 이어지고 있다"고 밝혔다.

홍 차장은 "뉴질랜드의 경우 의사나 간호사가 되려면 현지에서 따로 시험을 통과해야 하며 취업비자로 건너가더라도 1년동안 현지의 종합병원에서 임시로 근무해 평가받은 뒤 이주 허용여부를 결정한다"며 "취업이민 허가 받기가 어려운데도 상담은 계속 늘어나는 추세"라고 말했다.

최근 뉴질랜드 이주설명회에 참석했던 오주성(49)씨는 "회사의 사정이 좋지 않아 퇴출대상이 될 가능성이 있다"며 "회사의 미래에 대한 불안감 때문에 잠을 이루지 못하는 날이 많고 아들의 대학문제도 걸려 모두 털어버리고 떠나기로 가족들과 합의했다"고 설명했다.

전문가들은 이같이 이민이 급증하고 있는 것에 대해 "경제·사회적인 불안이 이민을 ''탈출구''로 만들고 있다"며 "대안이 없는 경우라면 몰라도 능력과 재산이 있는 중산층이 떠나는 것은 국가적인 손실"이라고 지적하고 있다.

장유택 기자 changyt@hankyung.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