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6일 오전 10시30분 쉐라톤워커힐호텔 1603호.북에서 내려온 주영훈(69)씨와 형 영관(72·서울 마포구 도화동)씨의 개별 상봉이 이뤄졌다.

형제는 전날 단체상봉장에서 못다한 회포를 마음껏 풀었다.

표정도 전날과는 달랐다.

영훈씨는 이번 서울 방문단 일행중 유일하게 북에서 장관급을 지낸 고위급 인물이어서 눈길을 끌었다.

이날 재회 장소에는 동생 영옥(여·미국 거주),영희(여·68) 애자(여·59) 영인(54)씨 등이 자리를 같이 했다.

어젯밤 잘 주무셨느냐는 기자들의 질문에 영훈씨는 "피곤하긴 했지만 그리던 형제를 만나니까 잠도 안오고 해서 밤늦게서야 잠자리에 들었다"고 말했다.

영훈씨는 지난 세월에 대해 운을 뗐다.

전날보다 훨씬 밝고 자유로운 표정이었다.

"50년전 북한에 들어가 낙동강과 팔공산 전투에도 참여했다.전쟁이 끝나고 ''남쪽에서 대학 다니던 사람들은 다 대학보내 공부시키라''고 최고사령관이 명령했다.그때 화학공대에 배치돼 5년간 근무했다"고 회상했다.

영훈씨는 이어 "북한에 간 사람들은 박대받고 차별받는다고 알려졌지만 그렇지 않다.나중에 나는 여기서 장관급인 건설자재부장으로 일했다"고 설명했다.

형 영관씨는 "50년만에 동생을 만났지만 옛날과 똑같이 소탈하고 명랑했다.약간의 충격이었다.마치 몇년간 여행 갔다온 동생을 만난 느낌이었으니까.처음엔 울었지만 나중에는 껄껄대고 웃었다"며 밝게 말했다.

그는 앨범과 노트를 펼쳐보이며 장황한 설명을 덧붙였다.

"우리는 같이 산 20년보다 헤어진 시간이 더 길어.최근 남쪽 식구 모두가 한일관에 모여 저녁을 먹고 사진을 찍었다.일가족이 모두 35명이나 모였다.식구들중 영훈이를 아는 사람은 나하고 동생 4명 밖에 없었다"고 설명했다.

영관씨는 대학노트 한권에 5명의 식구가 35명이 된 내력을 다 적었다고 한다.

영관씨는 바로 이 노트가 아우에게 전하는 가장 큰 선물이라고 말했다.

잃어버린 50년이 빼곡히 쓰여있는 ''가족사''였다.

강창동 기자 cdkang@hankyung.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