중앙투자신탁의 김천겸 실장은 지난해 연말 시내에서 대학동창들과
망년모임을 가졌다.

약속시간은 저녁 7시.

그러나 그 시간에 맞춰온 사람은 절반도 안됐다.

전원이 모두 참석한 것은 약속보다 무려 1시간이나 훨씬 지나서였다.

"차가 밀리더라"라는 핑계아닌 핑계를 댄 친구가 일부 있었을 뿐 나머지
지각자들은 미안하다는 표정조차 짓지 않았다.

일찍 온 사람들도 늦어본 경험이 많은지라 "그러려니..."하고 넘어갔다.

늦는걸 당연시하는 세태.

세계와 어울려 살아온지 수십년이 지났건만 아직도 "코리언 타임"은 살아
있다.

일반인이 시간을 맞추는 기준인 방송국조차 코리안 타임의 관행에서는
예외가 아니다.

라디오는 좀 낫지만 TV는 예고된 시각대로 정확히 방송되는게 드물다.

좀 "뜬다"하는 프로는 광고물이 몰리면서 예정시간보다 2,3분 늦게 시작하기
예사다.

이때문에 중요한 프로그램을 녹화하기 위해서는 앞뒤 십분 가량은 여유를
두고 예약해놔야 한다.

좀 심하게 말해 시간표대로 움직이게 되어 있는 모든 사회적 약속에서
우리는 "예정보다 다소 늦어질 수 있다"를 체질화해 살고 있다.

비록 몇분 안되는 차이일지 몰라도 이같은 "시간 지체의 일상화"가 주는
의미나 이미지의 손상은 크다.

최근 "한국인 비판"이라는 책을 펴낸 일본인 사업가 이케하라 마모루씨는
"한국에서 제 시간에 방영되는 프로그램은 9시 뉴스뿐"이라고 혹평하기도
했다.

백보를 양보해, 한국인끼리라면 코리언 타임이 문제가 안될 수도 있다.

그러나 글로벌 거래에서는 치명적이다.

한울농산의 백창기 전무는 지난 96년 김치를 일본에 첫 수출했을 때 대리인
으로부터 "신선도가 떨어진다"는 연락을 받았다.

납기일은 하루가 채 안남아 있었다.

고민끝에 모두 폐기처분한 뒤 밤을 새워 물건을 만들고는 항공편으로
납기일을 맞췄다.

손해는 봤지만 이 일이 계기가 돼 한울농산은 일본 바이어로부터 완벽한
신뢰를 얻어내 전국 편의점에 납품할 수 있는 기회를 얻었다.

한국과학기술원 어학센터의 윌리암 슈미츠씨는 "한국사람들은 시간에 대해
엄격하지 않아 오히려 약속을 지킨 쪽에서 미안스러울 때가 있다"며 "그러나
세계가 하나로 움직이는 시대에 이같은 관념을 계속 갖고 있어서는 곤란할
것으로 본다"고 말했다.

< 대전=이계주 기자 leerun@ >

( 한 국 경 제 신 문 1999년 1월 21일자 ).